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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29) 백범을 살린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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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12 18:22 조회1,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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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집행을 하려 했으나



이를 안 고종께서 중지시키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 때 바로 개통된 전화가 없었다면 전달이 늦어저서



아마도 사형이 집행되었고 [현대판 아차산이야기]가 될 뻔 했습니다.



이에 대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사형수 백범 김구를 살린 전화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물으시면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라고



말하겠노라고 했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님,



그는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45구경 미제권총에서 발사된 4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 보다 50여 년전인 1896년 8월 죽음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사건이 있었다.



치하포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일본군인을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인천감옥에 수감된 후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김구 선생이 살해한 일본군인은 바로 국모였던 민비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사람이었으나,



고종은 그 사실을 사형선고 이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사형집행당일 보통 때 같으면 낮에 집행함이 원칙이나



김구(당시는 김창수)선생이 수감되어 있던 인천 감리서의 관리들이



젊고, 또 심문과정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기개가 넘치던 김창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 저녘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던중



천행으로 고종의 사형집행 연기결정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 때 사용된 연락수단이 3일전 개통된 한성-제물포 간 행정전화였다.



전화의 개통이 없었더라면 김구 선생을 살리고자 하는 고종의 마음은



사형이 집행된 후에나 전달되었을 것이며, 중국대륙을 주름잡으며 불굴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우리민족의 지도자, 민족의 분단을 막기위해 38선을



넘나들며 애썼던 우리민족의 지도자, 그의 탄생 역시 없었을 것이다.







이 일화는 백범일지에 그 때 상황이 자세히 있어 이런 일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이야기 꺼리가 되었다.



이에 대한 백범일지 부분을 다음에 실어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김정중 - 대부님! 그래서 저 여기 있습니다 hahaha

▣ 김항용 -

▣ 김재원 - 귀중한자료 입니다.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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