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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선조(朝鮮朝) 양반가(兩班家)의 과부(寡婦)에 대하여 양원(陽園) 김재갑(金在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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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11-21 12:16 조회1,44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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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정(栗亭) 홍천민(洪天民) 부인(夫人) 유씨전(柳氏傳)
유씨(柳氏)는 광해조(光海朝)때 사람으로 율정(栗亭) 홍천민(洪天民)의 후취 부인이다.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의 어머님이고 유당(柳棠)의 따님이며,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의 누님이시다.
부인이 어렸을 때에 그의 동생인 몽인(夢寅)의 공부하는 것을 곁에서 보고 기억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에 깊이 통달하여 문장이 견줄만한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 났었다.
그러나 부인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여자는 글을 짓고 읊조리는 일을 즐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전하여오는 글이 전혀 없고 오직,
入洞穿春色(입동천춘색) 동리를 들어가니 봄의 기운이 뚫고 들어 왔고,
行橋踏水聲(행교답수성) 다리를 거닐면서 물소리를 밟고 있네
라고 한 글귀만이 세상에 전하여 올 뿐이다. 부군(夫君)인 율정(栗亭)이 돌아가서 장례를 마친 후에 삭망(朔望)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제문을 지어 읽고 나서는 즉시 불살라 버렸다.
율정(栗亭)의 동생인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이 옆에서 들음에 글의 내용이 비통하고 간절하면서 엄숙한지라 감히 보기를 간청하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학곡 홍서봉이 일찍이 고아가 되고 부인이 친히 학문을 가르쳤는데 학문을 열심히 하도록 권할적에 몹시 엄숙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한 점이 보이게 되면 피가 흐르도록 종아리를 치고 또 한 비단 보자기로 회초리를 싸서 감추어 두면서 “가문이 흥기하고 기울어지는 것과 자식의 부지런함과 나태한 것이 이것과 관계가 되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였다.
학곡이 글을 읽을 적이면 반드시 장막을 치고 듣고 있었는데, 말하기를 “아이가 혹시라도 글을 잘 외게 되면 내가 반드시 기쁜 빛을 들어 내게 될것이니 아이가 만약 그것을 보게 된다면 교만하여지고 나태하여질 것이다. 이 때문에 가리고 있노라”고 하였다.
그 아들이 학업을 성취하여 문장이 되었고 벼슬은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말년에 부인이 호당(湖堂)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지키고 있는 늙은 할멈이 호당에 전래하여 오는 옥잔을 꺼내 보이면서, “이 잔은 선생이 아니면 마실수가 없습니다.”함에 부인이 웃으면서 “내가 비록 부인이지만 나의 시아버님과 남편과 시동생 그리고 나의 자식, 나의 조카등이 모두 호당에 선임 되었으니 내가 이 잔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말인가?”하니 듣는 이들이 미담(美談)이라고 하였더라.
부인이 일찍이 너무 가난하여 채소반찬의 밥과 나물국도 자주 거를 때가 많았었다. 하루는 계집종을 보내어 고기를 사오게 하였는데 고기의 빛깔이 독이 있는 것 같은 것을 보고 종에게 고깃간에 파는 고기가 얼마나 있었는가를 물어보고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종을 시켜 그 집의 고기를 모두 사다가 담장 아래에 묻고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이 사다 먹고 병들까 두렵다.” 하였다고 전한다.

홍천민(洪天民) 1526~1674 중종21~선조7
文臣으로 字는 達可 號는 栗亭, 本 南陽 大司成과 禮曹參議를 역임.
홍서봉(洪瑞鳳) 1572~ ? 선조5~ ?
號 鶴谷, 天民의 아들 左議政, 領議政을 역임
유몽인(柳夢寅) 1559~1623 명종14년~인조1)
字 應文 號 於于堂, 興陽人, 예조참판 역임.
홍성민(洪聖民) 1536~1594 중종31~선조27
홍천민의 아우 서경덕, 이황의 문인 예조판서, 대사헌 역임.
湖堂: 독서당을 고쳐부른 이름, 조선조 세종대왕이 藏義寺를 집현전 여러 신하에게 내어 주어 독서하도록 명하면서 붙인이름, 그후 성종이 독서당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호당이라 이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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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