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1(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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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4-03 12:10 조회1,936회 댓글0건본문
강화사에 나타난 충렬공(사단법인 강화문화원, 1994)
p136. 11. 몽고군의 강도 對岸(대안) 출현상황.
그런가하면 1238년(고종 25년) 전란의 와중에도 각 고을 병사들을 징집하여
강화 연해 뚝을 수축하였고 고종 35년(1248년)에는 북쪽에서 피난 들어온 사람
으로 노역을 시키는데 병마판관 김방경은 간사지를 개간하고 돌피를 심어 군민
의 원성을 샀으나 그 해 크게 여물어 주린 배를 채우게 되었는데 몽고병이 그
대로 머물러 있었고 우물이 없어 음료수에 곤란하여 저수지를 만들어 여름에는
이수하고 동절에는 얼음을 이용하였다. 군민들의 궁핍과 생활상은 이로써 충분
히 엿볼 수 있다.
p141. 13.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와 여파.
원종 12년(1271년) 5월 연합군은 삼군으로 편성하여 김방경과 몽고 장수 흔
도가 중군으로 몽장과 고려 장수들로 지휘관을 삼아 삼면으로 상륙작전을 개시
하였는데 몽장은 진도 동남방 노루목 측면을 화공을 가하니 삼별초군이 소홀했
던 해면이라 순식간에 궤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p143. 144. 15. 연합군의 제주도 공함과 여파.
5. 연합군은 고려군 6,000명, 몽고군 2,000명으로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
가 지휘하여 명월포와 합덕포로 상륙하니 삼별초 합덕포 수비병들은 바위틈에
복병하였는데 관군들이 돌격하여 오니 부득이 격파되고 말았다.
6. 상륙작전에 성공한 김방경은 서편으로 진격 항파두성을 공격하고 이어서
파군봉을 격파하였는데 항파두성 전투는 삼별초의 결사적 저항이 있었으나 열
세로 함락되었다.
10. 이에 김통정 삼별초 수장은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산중으로 퇴각하
여 김방경에게는 동족상잔의 비운을 원망하는 글을 체송하고 부인과 함께 조국
의 영원을 빌며 몽고군을 저주하면서 자결하였다. 이로써 삼별초는 몽고와 항
전한지 4년만의 혈사로 종막을 고하였다.
12. 김방경은 삼별초를 평정하고 병사 1,000명으로 제주를 수습케 하였고 몽
고는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사병 500명으로 목마장을 관리케 하였는데 제주민
은 몽고인의 학대에 몹시 시달려 왔다. 공민왕 23년 (1374년) 몽고인의 반란이
있어 백수장군 최영이 토벌하기에 이르러 평온을 되찾았다.
p.148. 149. 17. 독재자의 최후(원종폐위).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원종을 폐위하자 원 세조는 임연에게 압력을 가
했는 바) 임연은 추밀원 부사 김방경 대장군 최동수 등을 몽고에 보내고 역시
질병으로 인한 양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p.368. 안동김씨.
판결사 익원공 사형의 후손 良(량)이 자점의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초지로 피
해 왔었는데 불은면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초지로 돌아와 정착한 뒤 10여대
를 살고 있다.
상신상락 부원군 (질)의 후손 正台(정태)가 오상리로 와 사는 지가 10여대
에 이르고 있다.
고려조 충렬공 방경의 원손 應浩(응호)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홍리(옛 홍천)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 살다가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金 (김영)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p.789. 790. 4. 농지개량.
고려 고종 25년에 최우가 강화 연해안에 뚝을 쌓고 북방민으로 하여금 본도
에 들어와 뚝을 보수하게 하였다. 이 때 연해 여러곳에 조수가 출입하고 갈대
가 무성하여 경작하지 못했던 간사지를 병마판관 김방경으로 하여금 뚝을 쌓고
간사지를 개간하여 피를 심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민원이 있었으나 피가 잘되
어 여러 해동안의 병란에도 기근을 면케 하였다 하며, 또 저수지를 만들어 여
름이면 논에 물을 이용하게 하고 겨울이면 얼음을 뚫고 음료수로 이용하게 하
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간포(지금의 송해면 당산리) 해안 뚝은 이조 인조,
월곶 뚝은 효종 때에 쌓은 것이며 대청개 뚝. 승천포 뚝. 장지포 뚝. 망월포 뚝
은 이조 현종시에 쌓았으며 비포 선두포 뚝은 숙종 때 쌓은 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p.791. 6. 뚝과 제방.
이 때 강화 해안 처처엔 조수가 밀려들어 평야는 황폐하여 갈대밭이 되어 경
작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병마판관 김방경이 뚝을 쌓아 간사지를 개간하여 먼
저 돌피 씨를 뿌리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지라. 이해 가을에 피가
잘 여물어 다년간에 걸친 몽고병란에 있어 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강화에는 우
물이 없었는데 또 저수지를 쌓게 하여 여름철에는 농사 짓는데 물을 돌려 쓰
기도 하며 겨울이면 어름을 쪼개어 음료수로 쓰게 하였으니 다 이를 이용함으
로써 비로소 그 지혜로움을 알게 하였다.
p.940. 海寧鄕墟(해령향터)
양도면에 위치한 진강산 서쪽 5리에 있었다고 했을 뿐 문헌에 정확한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전설이 세가지가 있으니 각자 판단에 일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중략) 또 한설에 의하면 진강산 서쪽이 아니라 동편 5리쯤이니 길상면 온수리
에 있는 해랑당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고려 고종 때에 도원수 김방경이 이곳
에 살았다하여 원수리로 하였는데 이가 와전되어 온수리로 된 것이며 그가 살
던 집에 현판을 해령당이라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한 것이 이곳에서 연
유된 것이다.
※ 혹 본 강화사 내용중 사실과 다르거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누락된
선조분들의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이왕 나서신 김에 우리나라 모든 시군지를 섭렵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항용 -
▣ 김항용 - 귀한 자료들을 구하셨습니다.
▣ 김은회 - 귀중한 자료 잘보았습니다.
▣ 김정중 -
▣ 김영환 -
▣ 김태서 - P368 저희와 가장 가까운 집안 같군요.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 김영윤 -
p136. 11. 몽고군의 강도 對岸(대안) 출현상황.
그런가하면 1238년(고종 25년) 전란의 와중에도 각 고을 병사들을 징집하여
강화 연해 뚝을 수축하였고 고종 35년(1248년)에는 북쪽에서 피난 들어온 사람
으로 노역을 시키는데 병마판관 김방경은 간사지를 개간하고 돌피를 심어 군민
의 원성을 샀으나 그 해 크게 여물어 주린 배를 채우게 되었는데 몽고병이 그
대로 머물러 있었고 우물이 없어 음료수에 곤란하여 저수지를 만들어 여름에는
이수하고 동절에는 얼음을 이용하였다. 군민들의 궁핍과 생활상은 이로써 충분
히 엿볼 수 있다.
p141. 13.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와 여파.
원종 12년(1271년) 5월 연합군은 삼군으로 편성하여 김방경과 몽고 장수 흔
도가 중군으로 몽장과 고려 장수들로 지휘관을 삼아 삼면으로 상륙작전을 개시
하였는데 몽장은 진도 동남방 노루목 측면을 화공을 가하니 삼별초군이 소홀했
던 해면이라 순식간에 궤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p143. 144. 15. 연합군의 제주도 공함과 여파.
5. 연합군은 고려군 6,000명, 몽고군 2,000명으로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
가 지휘하여 명월포와 합덕포로 상륙하니 삼별초 합덕포 수비병들은 바위틈에
복병하였는데 관군들이 돌격하여 오니 부득이 격파되고 말았다.
6. 상륙작전에 성공한 김방경은 서편으로 진격 항파두성을 공격하고 이어서
파군봉을 격파하였는데 항파두성 전투는 삼별초의 결사적 저항이 있었으나 열
세로 함락되었다.
10. 이에 김통정 삼별초 수장은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산중으로 퇴각하
여 김방경에게는 동족상잔의 비운을 원망하는 글을 체송하고 부인과 함께 조국
의 영원을 빌며 몽고군을 저주하면서 자결하였다. 이로써 삼별초는 몽고와 항
전한지 4년만의 혈사로 종막을 고하였다.
12. 김방경은 삼별초를 평정하고 병사 1,000명으로 제주를 수습케 하였고 몽
고는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사병 500명으로 목마장을 관리케 하였는데 제주민
은 몽고인의 학대에 몹시 시달려 왔다. 공민왕 23년 (1374년) 몽고인의 반란이
있어 백수장군 최영이 토벌하기에 이르러 평온을 되찾았다.
p.148. 149. 17. 독재자의 최후(원종폐위).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원종을 폐위하자 원 세조는 임연에게 압력을 가
했는 바) 임연은 추밀원 부사 김방경 대장군 최동수 등을 몽고에 보내고 역시
질병으로 인한 양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p.368. 안동김씨.
판결사 익원공 사형의 후손 良(량)이 자점의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초지로 피
해 왔었는데 불은면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초지로 돌아와 정착한 뒤 10여대
를 살고 있다.
상신상락 부원군 (질)의 후손 正台(정태)가 오상리로 와 사는 지가 10여대
에 이르고 있다.
고려조 충렬공 방경의 원손 應浩(응호)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홍리(옛 홍천)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 살다가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金 (김영)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p.789. 790. 4. 농지개량.
고려 고종 25년에 최우가 강화 연해안에 뚝을 쌓고 북방민으로 하여금 본도
에 들어와 뚝을 보수하게 하였다. 이 때 연해 여러곳에 조수가 출입하고 갈대
가 무성하여 경작하지 못했던 간사지를 병마판관 김방경으로 하여금 뚝을 쌓고
간사지를 개간하여 피를 심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민원이 있었으나 피가 잘되
어 여러 해동안의 병란에도 기근을 면케 하였다 하며, 또 저수지를 만들어 여
름이면 논에 물을 이용하게 하고 겨울이면 얼음을 뚫고 음료수로 이용하게 하
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간포(지금의 송해면 당산리) 해안 뚝은 이조 인조,
월곶 뚝은 효종 때에 쌓은 것이며 대청개 뚝. 승천포 뚝. 장지포 뚝. 망월포 뚝
은 이조 현종시에 쌓았으며 비포 선두포 뚝은 숙종 때 쌓은 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p.791. 6. 뚝과 제방.
이 때 강화 해안 처처엔 조수가 밀려들어 평야는 황폐하여 갈대밭이 되어 경
작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병마판관 김방경이 뚝을 쌓아 간사지를 개간하여 먼
저 돌피 씨를 뿌리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지라. 이해 가을에 피가
잘 여물어 다년간에 걸친 몽고병란에 있어 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강화에는 우
물이 없었는데 또 저수지를 쌓게 하여 여름철에는 농사 짓는데 물을 돌려 쓰
기도 하며 겨울이면 어름을 쪼개어 음료수로 쓰게 하였으니 다 이를 이용함으
로써 비로소 그 지혜로움을 알게 하였다.
p.940. 海寧鄕墟(해령향터)
양도면에 위치한 진강산 서쪽 5리에 있었다고 했을 뿐 문헌에 정확한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전설이 세가지가 있으니 각자 판단에 일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중략) 또 한설에 의하면 진강산 서쪽이 아니라 동편 5리쯤이니 길상면 온수리
에 있는 해랑당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고려 고종 때에 도원수 김방경이 이곳
에 살았다하여 원수리로 하였는데 이가 와전되어 온수리로 된 것이며 그가 살
던 집에 현판을 해령당이라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한 것이 이곳에서 연
유된 것이다.
※ 혹 본 강화사 내용중 사실과 다르거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누락된
선조분들의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윤만 종친님!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이왕 나서신 김에 우리나라 모든 시군지를 섭렵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항용 -
▣ 김항용 - 귀한 자료들을 구하셨습니다.
▣ 김은회 - 귀중한 자료 잘보았습니다.
▣ 김정중 -
▣ 김영환 -
▣ 김태서 - P368 저희와 가장 가까운 집안 같군요.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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