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21) 동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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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02 18:37 조회1,908회 댓글0건본문
동학은 1860년(철종 11)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종교이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린 헌종왕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 ·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 ·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 ·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 ·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 ·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 ·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 ·교수(敎授) ·교집(敎執) ·교강(敎綱)
·대중(大中) ·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동학교주
창시자 최재우
본관 경주(慶州).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2대교주 최시형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3대교주 손병희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대표적 신흥종교이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린 헌종왕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 ·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 ·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 ·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 ·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 ·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 ·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 ·교수(敎授) ·교집(敎執) ·교강(敎綱)
·대중(大中) ·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동학교주
창시자 최재우
본관 경주(慶州).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2대교주 최시형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3대교주 손병희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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