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김세익(金世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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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5-30 22:25 조회1,394회 댓글3건본문
김세익(金世翊) (1634∼1698)
김세익(金世翊)은 김언의 아들로 1634년 갑술에 태어났다. 자(字) 량경(亮卿)이고 외조부(外祖父) 이선립(李先立) 처부(妻父) 이후응(李後膺)이며, 경(京)에 거주하였고, 1654년(효종5) 서학(西學), 동학(東學) 식년(式年) 진사(進士) 급제하였으며, 전주판관(全州判官)을 역임하다 1686년(숙종12) 정시(庭試) 병과2(丙科2)로 급제하였으며, 관직 경상감사를 지냈다.
김세익 약력
1634(인조12)-1698(숙종24).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亮卿(양경).
아버지는 성천부사 王+言(언), 어머니는 李先立의 딸. 아버지가 병자호란때 적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자 중림찰방에 기용되어 관계에 나갔으나 1681년(숙종7) 헌납 朴泰孫으로부터 탐학하다는 탄핵을 받아 仕版(사판)을 삭거당하였다.
그뒤 다시 서용되었으며 1686년 전주판관으로 재임시 53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사간원에 들어갔다.
1694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시에 시관으로 영남지방을 다녀와서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宮房의 침탈상을 보고하고 그 구제책을 촉구한 바 있으며, 이듬해에도 군병의 기강확립과 궁방의 검약한 생활 등을 건의한 바 있다.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강화도에 있으면서 충렬사 제문을 지었다.<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이후 여러차례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1698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시 도내를 순시하던 중 청송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 국조방목 淸選考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상도 선생안 (상주문화원)
◇김세익(金世翊)
o직 명:통정대부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대구도호부사(通政大夫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邱都護府使)
o재임기간:1698년(숙종 24년) 무인(戊寅) 9월 16일~1698년(숙종 24년) 무인(戊寅) 10월 23일 졸서(卒逝)
조선왕조실록 기록 요약
---○ 표시는 낙서의 손자 文臣 김세익 기록,
▶ 표시는 응해의 손자 武班 김세익 기록인 듯---
1685년 ▶숙종11/01/05(을축) 특지(特旨)로 김세익(金世翊)에게 좌윤(左尹)을 제수(除授)하였다. 이어서 김세익(金世翊)의 사람됨과 그의 활쏘는 기예(技藝)를 칭찬하였다. 그러기에 이 명이 있었다.
1694년 ○숙종20/05/15(임자) 김세익(金世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숙종20/09/27(임진) / 부사직 김세익이 영남의 사정을 상소하다. 부사직(副司直) 김세익(金世翊)이 명을 받고 영남(嶺南)에 내려가 선비들을 시험보였다. 돌아와서 상소하여 본도(本道)의 사정을 논의하기를,
○숙종20/09/29(갑오) 김세익(金世翊)을 장령으로
1695년 ○숙종21/05/16(정축) 김세익(金世翊)을 헌납으로,
○숙종21/05/19(경진) 헌납 김세익이 성천의 은점 폐지와 초료의 폐단 등 관서지방의 민폐에 대하여 상소하다. 헌납(獻納) 김세익(金世翊)이 관서(關西)에 가서 선비를 시험보이고 조정에 돌아와 민폐(民弊)를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성천(成川)의 은점(銀店)을 폐지시킬 것과, 황주(黃州)·봉산---
○숙종21/08/02(신묘) 헌납 김세익이 국름을 허비하는 폐단 등에 대해 상소하다
○숙종21/08/14(계묘) 김세익(金世翊)을 집의(執義)로
▶숙종21/10/16(을사) 김세익(金世翊)을 총융사(摠戎使)로
○숙종21/11/06(갑자) 김세익(金世翊)을 사간(司諫)으로
1696년 ○숙종22/01/18(을해)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2/02/21(정미)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2/04/30(을묘)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2/05/20(을해) 좌변 대장 김세익
○숙종22/08/09(임진) 승지 김세익(金世翊)
1697년 ○숙종23/01/19(신미) 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이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모든 산들이 거의 민둥산이 되었으므로, 혹시라도 급박한 일이 있게 되면---
○숙종23/03/25(병자)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3/03#03(계미) 우승지(右承旨) 김세익(金世翊)
○숙종23/07/22(경자)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숙종23/09/28(을사) 김세익(金世翊)을 충청도 관찰사로
○숙종23/10/01(무신) 배천의 문회 서원에 편액을 내리고 치제하게 하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친히 문회 서원(文會書院) 네 자(字)를 써서 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을 보내어 편액(扁額)을 내리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숙종23/10/13(경신) 충청도 감사 김세익(金世翊)
○숙종23/10/13(경신) 김세익(金世翊)을 승지(承旨)로
1698년 ○숙종24/02/03(무신) 승지 김세익이 역로의 폐단을 아뢰고 사사로운 역마 이용 엄금을 청하다. ---모든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결재를 받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승지 김세익(金世翊)이 배천(白川)에 봉사(奉使)하였다가 막 돌아왔는데,
○숙종24/07/15(정해) 김세익(金世翊)을 경상도 관찰사로
○숙종24/10/29(경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세익(金世翊)이 졸(卒)하여 이세재(李世載)로 대신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009 06/06/30(정해)
/고 성천부사 김언의 철거된 정려를 세워줄 것에 관한 전 교관 김세보 등 삼형제의 상소
---전 교관(敎官) 김세보(金世輔) 등 형제 세 사람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비인 고(故) 성천부사(成川府使) 김언(金)은 일찍이 병자년의 난리에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하려고 하다가 적병에게 핍박을 받자 적을 꾸짖으면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의 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의 옷을 벗어 군관으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시체를 거두게 하고 조정에서 포장(褒奬)·정표(旌表)의 명이 전후에 계속해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갑진년에 역적 허적(許積)이 사감(私憾)을 풀려고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끝내 정문(旌門)을 철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소가 예조에 내리자, 예조에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
■ 김세익(金世翊) 인장
---인장1 : 金世翊印
---인장2 : 安東世家
<김세익 인장. 근역인수 게재>
■ 김세익 글
忠烈祠 祭文 (좌승지 金世翊, 1634-1698)
깊숙이 병자 정축년에 있어서랴. 어찌된 운수인지 재앙을 만나다니.
임금의 수레는 떠나려 하는데, 장관의 말은 급함을 알려오니 조정은 물끓듯이 어지러워라.
먼저 섬으로 피신을 해야지,
임금이 계신 곳은 소식이 끊겨지고 소리쳐 도와주는 이 없네.
긴 강물로 띠를 둘러 있는데 이른바 험한 요새지라 믿고만 있었는데.
사람의 꾀로서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데 북녘 오랑캐는 나는 듯이 건너 오네.
천작의 요충이라지만 창졸간에 빼앗겼으니 인축이 문드러져 산성에 그득하고 일반 백성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갈팡질팡 하는데
짐승도 놀라 뛰고 새는 숨기가 바쁘니 팔진미도 먹다가 버려야 하니 누가 일찍이 이를 분별하였으랴.
슬프다 그대 여러분 신하들이여 풍상은 급한데 굴하지 않는 분이 있으니 오직 이때의 元老인지라.
중요한 직분이 있는 것도 아니로데 용렬하게 결단을 내려 이곳에 부임하였으니 배운 것은 저버리지 않아 혹은 재상으로 봉직하면서 혹은 임금을 뫼시는 일에 앞장서는데 평복차림이 있었으니
음으로 보직되어 이바지 하였는데 서로가 이어서 이 나라에 신명을 바치었노라.
義는 중하고 생명은 가벼운 것이지, 하물며 여러 軍官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에 종과 편술관 패관 등이 있었으니 총책임자를 꾸짖으며 강물에 뛰어들었으며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중에 뛰어 들어가니 장수들은 패주하련만 우리는 열명 가운데 한 분이 살았겠지.
간은 이날 순국하였으니 신위야말로 비록 가지런하지 않아도 충신으로서는 서로가 짝지어 있노라.
예부터 난리에 있어서야 어찌 충의심이나 절개가 없을손가. 한편으로 드디어 모시었으니 더욱 높여야만 하네. (이하 생략)
(註)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本島에 있었다.
<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충렬사 (忠烈祠) (시도유형문화재 21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선원 김상용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 허재집 (원광대학 역)
虛齋와 그 文學 (원광대 교수 柳在泳)
허재집은 허재 柳惠源(1632-1695)의 시문집이다. 허재 세상을 떠난 100년쯤 뒤에 5세손 世夏( )가 필사하고 <世箕 使3종제 世夏詩 一○實記> 6세손 東琪가 趙宇熙의 序(1881)를 받아 간행하려다 못하였다.
그 뒤 9세손 桓圭가 尹夏重의 序(1918)를 받고 8세손 熙雨의 跋(1918)을 붙여 목활자본 3권1책으로 간행하였는데 허재 세상 떠난 200여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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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完山伯金亮卿世翊次柳處士韻贈別 /완산백김양경세익차류처사운증별
완산백 김양경 세익(1634-1698)이 유처사(▶유혜원, 1632-1695)의 증별시에 차운하여
淸談今獲久離餘 /청담금획구이여 /(집) 떠난 지 오랜데 이제 淸談했으니
忘却從來困簿書 /망각종래곤부서 /그 전 따분한 문서 잊어 버렸네
彭澤休官幽興在 /팽택휴관유흥재 /彭澤의 벼슬 그만 둔 그윽한 흥취 있으니
九秋佳節返吾盧 /구추가절반오로 /九秋 佳節에는 내 집에 돌아 가려네
*完山伯 : 전주부윤을 이리 지칭
*金亮卿 世翊 : 1687년(숙종13) 전주부윤으로 있었다. 이 詩는 1688년에 쓴 것으로 본다.
*淸談 : 맑고 고상한 이야기
*彭澤 : 중국 강서성에 있는 고을 이름. 晉의 도연명이 이 고을 원이 되었다가 五斗米로 허리 굽히기 싫다고 그만 두었음
*九秋 : 가을 90일 동안을 이름. 三秋
● 謝宛山府伯金亮卿世翊助貝+盡石溪崔先生祠宇啓 /사완산부백김양경세익조○석계최선생사우계
鳳谷金東準沙溪石溪門人配此祠宇在全州府 /봉곡김동준사계석계문인배차사우재전주부
완산부윤 김양경 세익이 석계 최선생 사우에 부조한 걸 사례한 글
봉곡 김동준은 사계 석계 문인으로 이 사우에 배향되었는데 전주부에 있다.
---내용 9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석계 최선생 :
*봉곡 김동준 :
● 謝宛山府伯金亮卿粧匣具籤於歷代史要啓 /사완산부백김양경장갑구첨어역대사요계
전주부윤 김양경이 역대사요에 장갑 구첨해 준 걸 사례하는 글
---내용 5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歷代史要(역대사요) : 중국의 전국시대로부터 5대 말까지의 역사를 간추려 10권으로 엮은 책. 권청하 편찬
*權靑霞(권청하) :
*粧匣(장갑) : 책을 좋게 보존하기 위해 갑을 만들어 끼워 둠
*具籤(구첨) : 籤紙(첨지)를 붙여 둠. 찾기 쉽게 종이 쪽지를 붙여 둠
허재집 권지3
부록
● 安東金世翊贈虛齋序 /안동김세익증허재서
안동 김세익이 해재(▶유혜원)께 준 서문
내(▶김세익)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문서와 편지2) 로 바빠3) 한 가지 아름다운 정서도 없고 술잔 들고 시를 읊는 그러한 겨를 또한 거의 없었다. 정묘년(▶1687년 숙종13) 여름 공무가 조금 한가하여 두건을 벗어 놓고5) 의의정에서 아이들과 새로 자란 대 수백 그루를 완상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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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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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언제 이런 자료를-- 감사합니다. 홈 주요 인물란을 신설하여 삽입하겠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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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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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상기 근역인수 내의 김세익 인장은 1)본 홈 n-nuri나 제 메일로 보내주십시요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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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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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역시 문중 자료의 백과사전입니다. 모아서 보니 더욱 좋네요.
안렴사공파 휘 세익 할아버지와 한자까지 같은 선조님으로 부사공파 휘 세익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두 분을 함께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