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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筆蹟-조선08 (金魯김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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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15 03:44 조회2,1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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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筆蹟-조선08 (金魯김로1)







유연재 김희수의 아들로 서운관정공파이신 김로(金魯) 선조는 1498(연산군4)- 1548(명종3)

조선의 문신, 서예가로, 자는 景參, 호는 東皐이며, 글씨가 뛰어나 조정의 전책과 고관들의 비갈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 김로, 아들 김홍도와 더불어 대대로 서예의 명가를 이룬 분입니다.





특히 1530년 저작으로 김안로의 석방을 탄핵했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기용된 적이 있었고



청원 오창면 양지리 산소동에 있는 안렴사공의 7세손인 김공예 (1485-1537)의 墓碣은 조선 중종34년(1539)에 김로 선조께서 書하신 것이고, 여주 백양동에 있는 안렴사공 김사렴의 7세손이고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金公亮(김공량, 1472∼1544)의 墓碑도 書하였습니다.







김로 선조께서는 부친 김희수와 마찬가지로 碑文을 많이 써서



[근역서화징]에 7점

[신고 한국서예사]에 8점이 소개되어 있고

[비문으로본 양주의역사]에 2점 (한세환 신도비, 송질 신도비 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필적으로 [김희수 김로 2가서법] 1책이 있습니다.







특히, 1996년에 서운관정공파종회에서 1996년 발간한 [국역 석릉세보] 에 보면

(서운관정공파) 金圭台 종친께서 識한 기록중에 다음 내용이 있습니다.



동고공 휘로 유묵 : 대동서법 (규장각 소장)



侍講院印이 찍힌 二家書法인 [戒酒文]과 가람 古754-D13의 [大東書法]에

김희수, 김로 두분 조상의 문장과 필적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에 각각 전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도

[槿域書彙]에

두분 조상의 글과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 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140. 金魯(김로)

자는 景參(경삼), 호는 東 (동고), 본관은 안동, 悠然齋 金希壽 (유연재 김희수)의 아들, 연산군6년경신 (1500)생, 중종20년을유 (1525)에 문과급제, 벼슬은 승지



서법이 가업으로 전해오는 일이 많았으니, 우리나라에는 이암-이강과 김희수-김로 부자가 모두 글씨를 잘 썼다. (지봉유설)



김로가 또 글씨를 잘 써서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 (국조인물고)



蜀體(촉체 : 조맹부체)에 능했다. (동국문헌 필원편)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연려실기술)



양주의 숙정공 宋 (송질)의 비

광주의 삭녕 南 (남변)의 비

제안대군 李 (이현)의 비

고양의 서양군 李韓義(이한의)의 비

김포의 판서 尹 (윤은)의 묘갈

용인의 도정 尹珍(윤진)의 묘갈

청주의 참봉 宋世良(송세량)의 묘갈을 썼다. (해동금석총목)



송질 비의 해서는 시원하면서도 자태가 있다. (동국금석평)











▣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金魯의 부친과의 2가서법



김로(1498-1548)는 본관이 안동, 대사헌 김희수의 아들로서 자가 景參, 호가 東皐, 부친 김희수와 함께 부자 명필이라 칭하였다.



< 행적 생략 >



글씨가 뛰어나서 조정의 각종 전책과 고관, 명사들의 碑碣을 많이 썼다.



[지봉유설]에 "서법다세업 아동즉 이암과 이강, 김희수와 김로부자 개선서"라고 부자 서가의 대표로 들고 있다.



[인물고]에도 "로우선서 유부풍"이라 하였다.



[동국문헌필원편]에 "선촉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년소선서"라 하였다.



[호음잡고]에 "자유로 민오과인하여 의논이 영발, 약관전에 상사에 오르고 서법이 존?, 가장에 희헌(왕희지, 왕헌지)의 전기가 있었다. 무릇 조정의 전책과 경대부의 비갈을 모두 그가 썼다"고 실려 있다.



그가 쓴 비갈은 [금석]에 기록된 것만도 다음과 같은 8기이다. 碑主가 모두 당세의 명류들이며 비문 작자들이 또한 일류 문사들이다.



광주의 제안 헌 대군 묘비 (이행 문)

양주의 송질 묘비 (성세창 문)

광주의 남변 묘표 (김안국 문)

파주의 성덕송수심 묘비 (이율곡 문)

광주의 정 영상 광필 묘비

예안의 이온계 묘비

양주의 김신천생해 묘갈

교하의 김 승지 영 묘비



[동국금석평]에는 "송질비해 ?이유자"라 평하였다.



필적으로 부친 김희수와의 [2가서법}이라는 각?본이 있다.











▣ 비문으로본 양주의역사 1권 (1998, 양주문화원)



◎ 한세환 신도비 (장흥면 삼상리)

-李荇은 글을 짓소

-及第 金魯는 글을 쓰다



◎ 송질 신도비 (은현면 선암리)











▣ 국역 석릉세보 (1996,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 金圭台 識 -



② 휘希壽 및 휘魯의 기록과 필적



[지봉유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부자가 다 글씨를 잘 쓴 사람으로는 金希壽, 金魯를 들 수 있다" 하였는데



侍講院印이 찍힌 二家書法인 [戒酒文]과

가람 古754-D13의 [大東書法]에

김희수, 김로 두분 조상의 문장과 필적이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에 각각 전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도 [槿域書彙]에

두분 조상의 글과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1) 안렴사의 7세손 안원군 사손파 (운당)



사손파는 안원군파(公亮) 로도 별칭되고 있다. 사손파는 안렴사공의 장파 직계로 <소윤공  - 지주사공遇周 - 판교공丸 - 참의공宗孫 - 참판공城 - 안원군公亮>으로 직결된 宗孫의 가계로 소정면 운당리 일대에 많은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안원군파의 파조가 되는 公亮(1472∼1544, 수73)은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자를 弼之, 호를 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補祚功臣(보조공신)에 올라 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학문과 덕행을 쌓아 默齋(묵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연산조에 스승과 뭇 선비들이 피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부인은 전주이씨 彭禾+惠의 딸이며, 외조가 강릉김씨이다. 묘는 여주 백양동에 있고 묘비는 湖陰 鄭士龍이 짓고 東皐 金魯가 썼다.









▣ 청원의인풍 (1991, 청주문화원)



金公藝 墓碣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 (1485-1537)의 묘갈은 조선 중종34년(1539)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산소동에 우참찬 成世昌이 지은 비문을 홍문관 부수찬 金魯가 써서 세웠는데 1915에 다시 세웠다.











▣ 명가의 족보 (1989, 황규성)



⊙ 김로(金魯)

1498(연산군4)- 1548(명종3)

조선의 문신, 서예가, 자는 景參, 호는 東皐, 대사헌 希壽의 아들, 20세 전에 사마시를 거쳐 1525년(중종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정자가 되고, 검열, 정자를 거쳐 1530년 저작으로 김안로의 석방을 탄핵했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기용, 직제학에 이르고 첨지중추부사로 죽었다.



글씨가 뛰어나 조정의 전책과 고관들의 비갈을 많이 썼다. 亭子를 지었는데 이색이 풍영루라 이름하고, 이숭인이 시를 남겨 놓아 명승으로 알려졌다.











▣ 디지털 한국학 홈페이지





⊙문과방목



김로(金魯)

중종(中宗)20년(1525년), 식년시(式年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98년, 무오

자(字) 경삼(景參)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희수(金希壽)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숙연(金叔演)

증조부(曾祖父) 김자행(金自行)



외조부(外祖父) 양치(梁治)

처부(妻父) 이성언(李誠彦)

자(子) 김홍도(金弘度)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19(기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한림,첨지사$(翰林,僉知事$), 호당&,직학&(湖堂&,直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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