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전의현의 안동김씨 문중 인물과 그 사회적 위상 김 소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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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작성일23-11-23 21:16 조회431회 댓글0건본문
조선전기 전의현의 안동김씨 문중 인물과 그 사회적 위상
□접수일:2021년 11월 19일,수정일:2021년 12월 14일,게재확정일:2021년 12월 20일
김 소 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요약:이 글은 조선전기 충청도 전의현의 안동김씨 문중을 대상으로 주요 인물의 역사적 가치를 제고하는 한편,당시 문중이 지녔던 지역사적 위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세종-세조 연간에 두각을 보인 주요 인물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그들과 연혼관계에 있었던 인물을 구체적으로 추적했다.
그 결과 고려말 전의현에 입향한 이래로 15세기에 이르러 김익정과 김수녕 등 세종과 세조의 측근으로서 왕의 신임을 받으며 중앙정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특히 그간 효자로 알려진 김익정은 1420년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제작을 감독한 인물로서 세종대 인쇄문화사에 있어서 주목해야 함을 밝혔다.
특히 그간 효자로 알려진 김익정은 1420년에 주조한 금속활자인 경자자의 제작을 감독한 인물로서 세종대 인쇄문화사에 있어서 주목해야 함을 밝혔다.
이 글을 단초로 역사인물의 발굴과 함께 지역학 연구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1452년(단종 즉위)에 김종서는 자신의 재종형 김익정에 대해 청렴하고 신의가 있는 자라고 평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김익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이러한 정치적인 족적보다는 효자의 이미지로 알려지고 각인되어 왔다.
I.서론
이 글은 조선전기에 충청도 전의현에 살았던 안동김씨 문중을 대상으로 문중의 사회적위상과 주요 인물의 역사적 가치를 제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의현은 현 세종특별자치시에 속하는 지역으로,이곳에 거주한 안동김씨는 충렬공 김방경(⾦⽅慶,1212-1300)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김방경의 5세손인 김성목(⾦成牧)대에 전의현으로 들어온 이래로 60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역사회에 공존하며 다양한 역사적 행적을 남겨두었으나,문중이나 인물에 대한 심층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들은 김방경의 5세손인 김성목(⾦成牧)대에 전의현으로 들어온 이래로 60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역사회에 공존하며 다양한 역사적 행적을 남겨두었으나,문중이나 인물에 대한 심층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 과거 세종지역에 분포한 문중을 살펴보면 14세기에 안동김씨,기계유씨 등 8개 성관,15세기에 진주강씨 등 11개,16세기에 장수황씨 등 25개,17세기에 청주한씨 등 34개,18세기에 경주김씨 7개 총 85개 정도이며,
이 중 전의면의 안동김씨,금남면의 창녕성씨・화순최씨,연동면의 장수황씨,조치원읍의 강화최씨,장군면의 전주이씨,연서면의 남양홍씨,연기면의 부안임씨,연동면의 경주김씨 등 8개 성씨가 대표적이다(세종특별자치시・국립민속박물관,2016).이 중 안동김씨는 호서읍지에서 이 지역의 원거성씨로 전의이씨 다음으로 기록되었고 수록된 인물도 19명으로 가장 많다.
그런가 하면 유현조에는 김성목,김휴,김익겸,김광순 등 모두 30여 명이,절의조에는 김제정,김기가,효행조에는 김익정,김사준이,열녀조에는 김혼의 처 남양홍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안동김씨는 세종시 지역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었지만,세종시에 세거했던 다른 문중의 인물들에 비해 거의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전의현에 입향한 시점으로부터 세조연간에 이르는 안동김씨 주요 인물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이들의 혼맥 관계를 토대로 문중의 정치적・사회적인 위상을 모색하였다.
다만 문집이나 실기 등 남아있는 자료가 매우 부족하고 고문헌등 1차 사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안동김씨족보나 관찬사료 및 전성지(全城誌)를 중
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이를 단초로 관련 기록물에 대한 새로운발굴 및 후속 연구 성과가 진행되어 한국사 및 지역사 연구가 한층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고려말 안동김씨의 전의현 입향
고려말 전의현에 입향한 안동김씨의 입향조와 관련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가장먼저 거론되는 입향조는 학당(學堂)김휴(⾦休,1350-1430)로 그가 부친 김성목을 모시고 낙향했다고 보는 견해이다(이해준,1997).
김휴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검교로 있다가,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호군에 임명했지만 부모를 봉양한다는 명분으로사양하고 전의로 귀향하였으며,가선대부 검교 한성 윤에 제수했으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자손들에게 직접 효를 가르쳤고,바르고 점잖아서 벗들에게 신의를 얻었고 타인의 잘못을 말하지 않아서 시골 사람들이 그를 매우 아끼고 공경했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 전의현에 입향한 인물로 김휴의 부친인 김성목이다.
김성목은 김구(⾦玖)의 아들로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며,전의현에 최초로 조성된 안동김씨 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김성목에 관한 행적으로는 족보에서 고려조에 공조 전서를 지내고,전의 학당리 운주산에묘가 있으며,
김성목은 김구(⾦玖)의 아들로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며,전의현에 최초로 조성된 안동김씨 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김성목에 관한 행적으로는 족보에서 고려조에 공조 전서를 지내고,전의 학당리 운주산에묘가 있으며,
정부인 흥양 조문우의 딸과 결혼했다고 기재된 내용이 전부이다. 입향과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기록으로 화천집(華泉集)에 수록된 금은(琴隱)조열(趙悅)의 묘갈명이 있다.
묘갈명 중 맹사성이 지은 만은(晩隱)홍재(洪載)의 행장에 “어느 날 밤에 판서 성만용,평리사 변윤,박사 정몽주,전서 김성목,대사성 이색 등과 함께 술을
묘갈명 중 맹사성이 지은 만은(晩隱)홍재(洪載)의 행장에 “어느 날 밤에 판서 성만용,평리사 변윤,박사 정몽주,전서 김성목,대사성 이색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이야기 했다.
이때 이색이 ‘비간은 죽고 미자는 떠났으며 기자는 종이 되었으니,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말하자 모두 승낙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때 이색이 ‘비간은 죽고 미자는 떠났으며 기자는 종이 되었으니,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말하자 모두 승낙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조열은 목은 이색의 문하생으로,고려가 망하자 함안에 은거한 인물이고,변빈
은 변효문(卞孝⽂)의 손자로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김성목의 아들 김휴의 스승이 정몽주라는 점을 감안하면,김성목이 위 인물들과 정치적인 노선을 함께 하면서 낙향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은 변효문(卞孝⽂)의 손자로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김성목의 아들 김휴의 스승이 정몽주라는 점을 감안하면,김성목이 위 인물들과 정치적인 노선을 함께 하면서 낙향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와 연관되어 입향조와 관련해서 전성지에서는 ‘김성목이 고려 말에
처음으로 전의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처음으로 전의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Ⅲ.김익정과 김수녕의 정치・문화 활동
전의현에 입향한 안동김씨 인물 중에서 조선전기에 두각을 보인 인물이 있는데,이는 김익정과 김수녕을 들 수 있다.먼저 운암(雲菴) 김익정(⾦益精,?-1436)은 김휴의 아들로,전성지에 ‘학문은 당대에 매우 뛰어났고,3년 상을 당하자 관직을 사양하였다.
빈민의구제에 힘쓰고 법에 따라 관직을 임명하고 법을 지키니 백관이 두려워하고 존경했다’고 기록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월군에서는 “성품이 청렴하고 근엄하여 한 터럭만한 일도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다.
향교를 창설하여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키고 학교를 일으키니 백성들이 다 감화하여, 지금까지도 강송(講誦)을 그치지 아니한다”라고 언급하였다.또한 1452년(단종 즉위)에 김종서는 자신의 재종형 김익정에 대해 청렴하고 신의가 있는 자라고 평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김익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이러한 정치적인 족적보다는 효자의 이미지로 알려지고 각인되어 왔다.
김익정의 효행과 관련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의현에서 ‘김익정과 김익렴 형제가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내용과 1820년(순조 20)에 김익정의 정려를 중수할 적에 ‘세조조에 명정(銘旌)’을 받은 기록이 전부일 뿐이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듯이 김익정은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장원할 정도로 학식이 출중했고,태종대에 사헌부 좌헌납,장령,영월 군수 등을 역임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1418년(태종 18) 6월 5일에 김익정을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하도록 하였는데,향후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종이 즉위하자 김익정을 승정원의 좌부대언,우대언,좌대언에 제수했던 것 같다.
특기할만한 점은 1418년(태종 18) 6월 5일에 김익정을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하도록 하였는데,향후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종이 즉위하자 김익정을 승정원의 좌부대언,우대언,좌대언에 제수했던 것 같다.
이처럼 세종의 측근에 서서 경연 교재를 선정해주고,2) 시강(侍講)을 담당하였으며,3) 성균관의 시험을 관리하고,능원(陵園)에 참알(參謁)할 물품을 점검 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1420년(세종 2)12월 9일에는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였는데,이 해는 김익정자신은 물론 세종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활자인쇄문화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시기이다.바로 이 해 겨울에 금속활자인 경자자가 주조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인쇄문화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초초대장경,재조대장경 등 고려시대로부터 내려온 뛰어난 인쇄기술의 전통을 이어받아,개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403년(태종 3)에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 활자는 조판법이 불편하여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양이 몇 장에 불과했기에,17년이 지난 1420년(세종 2)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공조 참판이었던 이천(李蕆)등에게 새로운 활자인 경자자를 주조하도록 명했다.
조선시대에 주조된 금속활자만 하더라도 35종 이상이 되는데,이 중 약 80%에 해당하는 28종 정도가 국가 주도 하에 제작되었다.
1) 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1452)7월 4일 3번째 기사. 2) 조선왕조실록 세종 즉위년(1418)11월 13일 1번째 기사. 3) 조선왕조실록 세종 1년(1419)12월 10일
경자자의 주조는 계미자 이래 17년 만에 이룩해낸 인쇄기술의 혁신이자 과학기술의 성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 활자로 찍은 인쇄물은 세종이 ‘참으로 정교하고 아름답다’고 칭탄했듯이 예술적 품격과 함께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겸하고 있다. 바로 이 활자의 주조에 안동김씨 김익정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김익정은 당시 경자자 제작의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을 만큼 세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고,‘주자발’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천,변계량,정초에 비해 서지 학계에서조차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김익정은 당시 경자자 제작의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을 만큼 세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고,‘주자발’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천,변계량,정초에 비해 서지 학계에서조차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아울러 문중은 물론 지역에서조차 그를 효자로 기억할 뿐 세종대의 그가 이룩한 정치사적,문화사적 업적은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실정이다. 다만 경자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서체에도 불구하고 글자가 너무 작아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읽기가 어려웠기에,이런 단점을 보완하여 경자자가 제작된 지 14년만인 1434년(세종 16)에 큰 글자를 자본으로 삼아 새로운 활자인 갑인자를 주조하였다.
이 활자의 제작에는 당시 집현전 직제학 김돈(⾦墩,1385-1440)이 관여했다.김돈은 김방경→선(愃)→승용→후(厚)→칠양(七陽)으로 이어지는 가계이며,김익정의 9촌 조카이기도 했다.
이 활자의 제작에는 당시 집현전 직제학 김돈(⾦墩,1385-1440)이 관여했다.김돈은 김방경→선(愃)→승용→후(厚)→칠양(七陽)으로 이어지는 가계이며,김익정의 9촌 조카이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김돈에 관한 행적은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자 천문에 매우 해박했다고기록하고 있다.
갑인자는 경자자를 주조했던 이천에게 감독하게 한 후,김돈을 비롯하여 집
갑인자는 경자자를 주조했던 이천에게 감독하게 한 후,김돈을 비롯하여 집
현전 직전 김빈,호군 장영실 등이 관장하여 만든 20여 만자에 달하는 동활자이다.갑인자는 글자크기도 커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문인들이 가장 애호하던 서체를 자본으로 했는데,이런 점에서 가장 많은 책을 찍어낸 활자이기도 하다.따라서 1434년부터 1777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5번이나 개주하면서까지 갑인자체의 활자를 활발히 사용하였다.
세종과 당대 지성인의 합작품인 경자자와 갑인자는 세종대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다양한 서적을 인출함으로써 조선시대 학문과 문화를 꽃 피우게 한 동인이 되었다.그리고 그 중심에 그간 효자로만 알려져 왔던 김익정이 있었다. 세종이 김익정을 신임하고 예우했던 상황은 그를 지신사로 발령한 후에 곧바로 경자자를 주조할 때 관리감독을 맡겼던 점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세종과 당대 지성인의 합작품인 경자자와 갑인자는 세종대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다양한 서적을 인출함으로써 조선시대 학문과 문화를 꽃 피우게 한 동인이 되었다.그리고 그 중심에 그간 효자로만 알려져 왔던 김익정이 있었다. 세종이 김익정을 신임하고 예우했던 상황은 그를 지신사로 발령한 후에 곧바로 경자자를 주조할 때 관리감독을 맡겼던 점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예컨대 1422년(세종 4)11월 24일에 전의에 계신 73세의 노부 김휴가 아들을 보러 서울에 왔다가 돌아갈 적에 김익정에게 술과 과일을 특별히 내려준 점에서도 알 수 있다.그러나 불과 한 달 만인 1422년 12월 7일에 행수(⾏⾸)의 관을 떠나는 법을 개정코자 하였고 입속(⼊屬)하는 격식을 분간하지 못한 죄로 병조 참의 윤회(尹淮)와 지병조사(知兵曹事)민의생(閔義⽣)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된 후 파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423년 7월에는 세종이 김익정에게 술을 하사하였고,1424년에 충청도 도관찰사로 제수하여 임금께 배사(拜謝)하자 중사(中使)를 보내 한강까지 전송해주기도 하였다.
이해 12월에는 예조 참판을 거쳐 이듬해 1월에 인수부 윤,5월 21일에 대사헌,1426년 5월에 예조 참판,동년 7월에 형조 참판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러나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갔을 당시에 진헌할 자리를 검찰하지 못하고 달아난 요동 군병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은 이유로 다시금 파면당하기도 하였으나,몇 달 후인 이듬해 2월에 특명으로 경기 감사에 다시 제수했다.이후 7월에 이조 좌참판,1434년 4월에 경창부 윤,1434년에 호조 우참판,한성부 윤,1435년에 형조 참판,경상도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인 1436년 1월에 사망했는데,당시 세종은 조의를 표하고 치제했을 만큼 예우하였다. 다음으로 김익정의 아들인 숙은 복녕,수녕,덕령,명령을 두었는데,네 아들 중 수녕이학문적,정치적으로 두각을 보였다.
김수녕은 자가 이수(頤臾),호가 소양당(素養堂)이며,문도(⽂悼)의 시호를 받았다.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는데,이와 관련된 일화로 김수녕이 태어나던 해에 조부 김익정이 사망하자 외조부 안숭선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는데 안숭선은 그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측했다고 한다.
1453년(단종 원년)에 18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동년 가을에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당시 김수녕의 문장에 대해 ‘문법이 웅장하고 심오하며 상세하고 한유의 문장을 많이 본받았다.’4)라고 평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라고 평하였데,다만 김숙 이후 세거지가 이동하면서 안동대도호부의 ‘인물’조에 편입되어 있다. 1460년(세조 6)에는 김수녕이 용인 현령 박거명(朴居明)이 새로 정자를 지으려 하면서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현령의 청렴함을 주제로 「용인신정기(⿓仁新亭記)」를 지었다.이 시가 동문선,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용인현조와 목민심서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라고 평하였데,다만 김숙 이후 세거지가 이동하면서 안동대도호부의 ‘인물’조에 편입되어 있다. 1460년(세조 6)에는 김수녕이 용인 현령 박거명(朴居明)이 새로 정자를 지으려 하면서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현령의 청렴함을 주제로 「용인신정기(⿓仁新亭記)」를 지었다.이 시가 동문선,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용인현조와 목민심서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문천 현판 시에 차운한 시[次⽂川板上詩韻],길성 현판 시에
차운한 시[次吉城板上詩韻],생각나는 대로[謾成],천사 김식(⾦湜)의 시에 차운하며[次⾦天使湜詩],삼척 죽서루 와수목교에 차운하며(次三陟⽵西樓臥⽔⽊嬌)등의 시가 동문선에남아있어 그의 문학적 평판과 성과를 엿볼 수 있다.
과거 급제 후 집현전 부수찬,병조 좌랑 및 삼사를 거쳐 한명회의 종사관이 되었는데,당시 세조의 변방정책은 물론 주역에 구결을 다는 작업에 참여하여 문무의 재능을 고루발휘하기도 했다.이에 세조는 김수녕을 한명회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고 칭탄하였다.4) 조선왕조실록 단종 1년(1453)11월 2일 2번째 기사.
성종대에는 왕을 보필하여 좌리공신 4등에 책훈되었고,1473년(성종 4)
4월 5일에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세조실록에는 그를 ‘사재(史材)’라고 칭할 정도로 역사에 매우 밝은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그가 죽자 조회를 폐지하고 조의를 나타내어 제사를 지내게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할 정도로 매우 예우하였다.
Ⅳ.조선전기 안동김씨 문중의 사회적 위상
이 장에서는 김익정을 중심으로 안동김씨 문중과 혼인관계를 맺은 인물들을 통해 문중의사회적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김익정의 부친인 김휴를 소개하면,그는 김익정을 비롯해 김익렴,유공(柳恭)과 박안생(朴安⽣,?-1444)에게 시집간 두 딸을 두었다.이 중 둘째사위 박안생은 순천박씨 전의현의 입향조로,이후에 관정리 박골은 박안생-중림(仲林)-팽년(彭年)가계가 세거하였다(오석민,2016).
박안생의 조부는 박숙정(朴淑貞)으로 대제학을 역임했고,박숙정은 원룡(元⿓)과 박안생의 부친인 원상(元象)을 낳았다.박원룡의 손자가 공양왕의 아우인 왕우(王瑀)의 사위가 된 박석명(朴錫命)이다.
김휴의 외손 박중림은 이조판서를 역임했고,동지중추원사를 지낸 신창의 명문가인 안동 김익생(⾦益⽣)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여 팽년,인년(引年),기년(耆年),대년(⼤年),영년(永年)을 낳았다.박팽년은 경주이씨 이제현의 6대손인 현령 이공린(李公麟)과 세종과 혜빈양씨(惠嬪楊⽒)에서 태어난 영풍군(永豊君)전(瑔,1434-1457)을 사위로 삼았고,두 아들 헌(憲)과 순(珣)은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죽은 인물들이다.
김익정은 고려조의 명문 안동권씨 권담(權湛,?-1423)의 딸과 결혼하였고,5) 김종서의 재종형이기도 했으며,박팽년의 부친인 박중림의 외백숙(外伯叔)이었다.이처럼 부친 김휴와 김익정 대에 순천김씨 김종서와 순천박씨 박안생-박중림-박팽년의 가계가 혼맥을 토대로 결속되었다(김경수,2014:35).
김익정은 진천송씨 송취(宋翠)와 최계남(崔季男)을 사위로 맞이했는데,이들은 계유정난,단종복위운동 등 김종서,박팽년 가문이 멸문지화를 입는 상황에서 친세조 정권에 협조한 인물들이었다.예를 들어 송취는 경기도 도사(1435),5) 권담의 고조인 권보(權溥,1262-1346)는 박사,우정언,시강학사를 거쳐 정1품 삼중대광에 올랐다.
권보는 충렬왕~충목왕에 걸쳐 5대 임금을 섬기며 당대의 부귀를 누렸다.가산을 축적했다는비난도 받지만,세대편년절요 등 역사서의 편찬과 사서집주의 간행과 보급 등 성리학을 전파하는데 공헌을 했다.또한 1346년(충목왕 2)에 아들 권준(權準),사위 이제현과 역대 효자 64명의 행적을 기린 효행록을 편찬하기도 했다.사헌부 지평(1439),충청도 도사(1441),제용감 부정(1451)을 거쳐 상호군(1453)이 되어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압령하여 평해에 안치했던 인물이고.과천과 금천의 현감을 역임한 최계남은 1457년에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꾀하던 이보흠(李甫欽)을 교살하는 임무를수행했다.
김익정은 슬하에 숙(潚),형(浻)등 2남 3녀를 두었다.김숙은 진천 현감,호조 정랑,사헌부 지평,상의원 별좌를 지냈고,세조 조에 이르러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내섬시판사로 있을 당시에는 사민 경차관으로서 충청지역의 조사를 수행했다.이렇듯 김숙은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주로 서울에서 생활했고,이 과정에서 그의 묘소가 금천(衿川)에 조성된다.김숙의 장인은 대제학을 지낸 순흥안씨 안숭선(安崇善,1392-1452)인데,안숭선의 조부가 조선 개국공신 안경공(安景恭)이다.
안숭선은 1420년(세종 2)에 장원에 급제했는데,이 시기는 김익정이 세종의 측근으로 정계에서 중요한 국정 수행을 담당하던 때였다.안숭선은 급제 이후 관직이 사헌부 감찰,형조 판서,지중추원사,집현전 대제학,좌참찬에 이르렀다.
또한 파저강의 야인 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세종의 신임을 크게받았고,조정의 인사까지도 깊게 관여한 인물이었다.
성삼문이 지은 안숭선의 신도비명에는“복녕(福寧)은 사직(司直)이명통(李命通)의 딸에게 장가들었고,둘째 수녕(壽寧)은 계유년에 장원하여 곧 집현전 부수찬에 제수되니 나이 겨우 18세였다.그는 공으로부터 양육을받고 또 글을 배운 자이다.”6)라고 하여 김숙의 차자 김수녕이 외조부 안숭선에게 학문적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보여준다.
성삼문이 지은 안숭선의 신도비명에는“복녕(福寧)은 사직(司直)이명통(李命通)의 딸에게 장가들었고,둘째 수녕(壽寧)은 계유년에 장원하여 곧 집현전 부수찬에 제수되니 나이 겨우 18세였다.그는 공으로부터 양육을받고 또 글을 배운 자이다.”6)라고 하여 김숙의 차자 김수녕이 외조부 안숭선에게 학문적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보여준다.
안숭선은 성삼문의 종고조부인 독곡 성석린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이러한 관계망에 따라 성삼문이 안숭선의 신도비를 짓기도 했다.안숭선의 동생인 안숭효의 사위는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이고,강희맹의 모친은 영의정 심온이며,동생은 강희안이다.심온의 딸이 바로 세종 비 소헌왕후다.
또한 김수녕은 태종의 4남인혜령군 이지(李,1407-1440)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안동김씨와 왕실과의 직접적인 통혼관계가 형성되었고,이후 김구년이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손녀와 결혼하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김익정 대에 이루어진 순천박씨,안동권씨,순흥안씨,진천송씨와의 직접적인 혼인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주이씨,창녕성씨,진주강씨,청송심씨와의 간적접인 인적관계망을 형성하였고,김익정의 손자와 그 아들대에 이르러서 왕실과의 통혼으로까지 이어지면서조선전기 전의현에 세거한 안동김씨 문중의 사회적 위상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이후
6) 成謹甫先⽣集 卷2,神道碑銘,左參贊⽂肅安公神道碑銘 幷序
6) 成謹甫先⽣集 卷2,神道碑銘,左參贊⽂肅安公神道碑銘 幷序
김익정의 차남인 김형으로부터 김부녕과 김구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무관직의 낮은 품계에그쳤음에도,화순최씨・고령신씨・장수황씨・광산김씨 등 당시 정계와 학계를 주름잡던 가문과통혼을 지속해 나갔다.
Ⅳ.결론
김방경으로부터 여말에 이르는 안동김씨 인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학문적 성과를 배경으로 당대 굴지의 집안과 연혼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안향,백이정,이제현 등 여말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주축이 된 인물들과의 교유 및 연혼관계를 통해 무신가문으로서의 색채를 벗어내고 문신가문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였다. 이후 세종지역에서는 전서공 김성목과 김휴 대인 고려 말에 충신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전의현에 입향하였고,세종 대에 이르러 당대의 학문과 문화를 꽃 피우게 하는데 일조했던 인물인 김익정을 배출해냈다.그는 세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전기 경자자본의 제작을 감독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익정의 손자 김수녕 역시 외조부 안숭선의 가학을 토대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역사에 매우 밝은 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안향,백이정,이제현 등 여말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주축이 된 인물들과의 교유 및 연혼관계를 통해 무신가문으로서의 색채를 벗어내고 문신가문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였다. 이후 세종지역에서는 전서공 김성목과 김휴 대인 고려 말에 충신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전의현에 입향하였고,세종 대에 이르러 당대의 학문과 문화를 꽃 피우게 하는데 일조했던 인물인 김익정을 배출해냈다.그는 세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전기 경자자본의 제작을 감독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익정의 손자 김수녕 역시 외조부 안숭선의 가학을 토대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역사에 매우 밝은 인물로 평가되었다.
또한 세조의 변방 정책과 함께 주역 구결 사업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집안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김익정 당대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들과의 혼인 관계망을 구축함으로써 전대의 위상에 버금가는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여흥민씨,경주이씨,청주정씨 등과의 중첩적인 연혼 관계를 토대로 지속적으로 세의를 다져나갔고,왕실과의 통혼 및 순흥안씨・순천박씨・순천김씨 등 권력의 최상층에 있던 가문들과 결속하여 지역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김경수(2014),“박팽년 가계의 전의현 입향과정”,전의현과 박팽년,
세종:도서출판 성원. 세종특별자치시・국립민속박물관(2016),세종시의 민속문화 4,서울:국립민속박물관. 오석민(2014),“박팽년 가계의 전의현 입향과정”,전의현과 박팽년,세종:도서출판 성원. 이해준(1997),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세종: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동문선. 성근보선생집. 신증동국여지승람. 안동김씨족보. 전성지. 조선왕조실록. 화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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