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청백리에 선정된 외손-유성룡(柳成龍)-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20-05-05 08:10 조회815회 댓글0건

본문

청백리에 선정된 외손-유성룡(柳成龍)-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05eba598ec84b1eba3a1.jpg 


 

유성룡(柳成龍)중종37(1542)선조40(1607)

할아버지는 간성군수 유공작(柳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는 이현(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厓).

명종 19(1564)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였다.

선조 1(1568) 대교, 1569년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부수찬·지제교·수찬를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73년 정언(正言이조좌랑 등을 지내고 1576년 전한·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선조 11(1578) 사간이 되었다.

1579년 직제학·동부승지·군기시정·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는데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을 원해 상주목사로 가서 예의와 겸양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였다.

선조 16(1583)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만들었고, 그 해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제학(提學)을 겸했으며 1585년 역모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상소가 있어 사직을 원하자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고향으로 가서 지냈다.

선조 21(1588)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내고 1590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서도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세자를 정하는 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처벌 수위를 두고 같은 동인끼리 의견이 갈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는데 온건파는 유성룡 등이고 강경파는 이산해 등이었다.

1591년 왜란(倭亂)이 있을 것에 대비해 장수 재목을 천거하라고 하자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현감 이순신을 각각 광주(光州)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또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413일 왜군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계략(計略)을 주고 요충지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또 소금을 구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조 26(1593) 10월 선조를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임진왜란 중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국정을 독단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선조 31(1598) 자기 심복들을 요소에 앉히고 국정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임금을 오도한다는 상소가 이어지자 선조는 유성룡을 믿는다고 했지만 결국 파직하였다. 1600년 벼슬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였으며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던 기간이 10여 년이었는데 임금의 대우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연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임금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영의정으로 있을 때 각종 보고서와 편지가 이곳 저곳에서 모여들었는데도 좌우로 응대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당시 신흠이 비변사의 낭관(郞官)으로 있었는데 신흠으로 하여금 붓을 잡고 부르는 대로 쓰게 하였는데 문장이 오래도록 다듬은 것과 같았다.

유성룡의 건의로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제조(提調)가 되어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등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충청도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지방의 산성을 수선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방어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었다. 선조 37(1604)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