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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에 선정된 외손-김겸광(金謙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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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20-05-05 07:59 조회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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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에 선정된 외손-김겸광(金謙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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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광(金謙光)세종 1(1419)성종 21(1490)

할아버지는 좌찬성 김문(金問)이고, 아버지는 김철산(金鐵山)이며, 어머니는 성천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는 위경(撝卿)이며, 호는 서정(西亭)이다.

세종 23(1441) 진사시에 합격하고, 단종 1(1453)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이 되었는데 1455년 여럿이서 기생을 불러 술을 마셨다고 문제가 되었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 뒤 감찰·정언을 지내고 1457년 병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의막(依幕)에서 여럿이 기생을 불러 술을 먹은 일로 문제가 되었고, 1459년 병조정랑을 거쳐 세조 6(1460) 장령에 승진되었다.

같은 해 8월 신숙주의 종사관이 되어 두만강변에 있는 건주위(建州衛) 야인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군기감 정()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옮겼다가 곧 동부승지를 지내고 우부승지가 되어 건주위의 야인을 회유하고 왔으며 1463년 우승지를 거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세조 11(1465) 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절도사로 있을 때 발영시(拔英詩)에 급제하고 평안도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를 받아 가정대부로 승진, 임명되었고 곧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만주의 야인을 회유하느라 고생을 하였다. 1467년 만주의 야인을 정탐하러 임의로 사람을 보냈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가 예조판서로 옮겼다.

1468년 경상도관찰사로 가서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정부의 양곡을 지원받아 해결하였고 예종 1(1469)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성종 2(1471) 성종 즉위에 공이 있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선정되고 광성군(光成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1227일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475년 공조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성종 13(1482)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하자 황해도에 진휼사로 나가 마음을 다해 조치하였고 다시 충청도에 진휼사로 갔다 왔으며 이듬해 정희왕후(세조의 왕비)가 승하하자 지중추부사로서 제조(提調)가 되어 장례를 주관하였다. 1484년 창경궁수리도감 제조가 되었으며 수리가 끝난 후 정헌대부에 올랐고 같은 해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이듬해 세자궁 조성공사의 제조를 맡았고 좌참찬이 되었으며 1486년 세자좌빈객(左賓客)이 되었다. 1487년 세자궁이 완공되어 그 공으로 다 큰말 1필과 사() 1필을 하사받았다. 1488년 나이 70이 되어 사직을 하려고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천성(天性)이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세밀하고 확실한 지조가 있었고 아랫사람을 대함에는 공손하고 효도와 우애는 간단함이 없었고 친구는 신의로 대하였다. 시호는 공안(恭安)인데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이고, 좋아하고 화()하여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 안()이다.

<4개 자료 모두에 수록되어 있음.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보면 사적(私的)으로 좋지 않은 내용도 많음.>

출처 : 조선의 청백리222 pp59~60/문학박사 조성린/조은출판사/2012

[출처] 김겸광|작성자 2008j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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