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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자정국존비-김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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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18-12-27 21:37 조회6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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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篆題)」

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幷序」
      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判繕工寺事進賢館提學知製 敎臣
      李叔琪奉敎」
      奉常大夫典校副令直寶文閣臣全元發奉 敎書幷篆」
臣謹按釋氏典佛出世一大事因緣騰之於口曰敎融之於心曰禪禪或可以心傳敎尤難於口演能口講而演義開發後蒙爲內三學都壇主惟慈恩國一大師是」
已師諱子安後因夢感改彌授俗姓金氏系出一善郡考皇漢磾追封奉順大夫典客令妣皇文氏公進之女追封和義郡夫人離胎未數日母遷隨姊氏以▨成事」
甫九歲始就師學詩書一聞輙誦聦敏絶倫十三投元興寺宗然堂下剃度受具習經論十九登選佛場上品科得住國寧寺二十九拜三重大師主講唯識論 宗▨」
耆師碩德咸執經座下共歎稀代之彥弱齡博學荷擔宗乘爲一時標準以三重主法前古未曾有而師爲之二住熊神寺別批爲首座三住莊義寺又加僧統四住
俗離山法住寺詣 殿下申聞下山大將軍金子廷出傳 王旨末法大宗匠曠刼難遇請撰經論章疏流通於世間蒙後進自承」
命已來手不釋巻講論無閒暇弘揚一代敎爲己任撰述經論之解凡九十二巻五住重興寺至」
太尉大王卽阼之年戊戌五月下批爲釋敎都僧統重興寺住持行智圓明大師六住瑜伽寺」
上之在燕都也尤信嚮大般若經令宿衛臣僚常夜頌之由是 殿下一行皆頌大般若經甞一日於 上國講主請釋難信解品諸講師云此無釋解者」
上遣使於師請撰解又請述心地觀經記皆卽疏記附使封獻諸講覯止爭相讃美服其稀有」
上心益加崇信七復住莊義寺戊申四月下批爲大慈恩宗師開內三學都壇主大莊義寺住持五敎都僧統廣智妙辯佛覺普明大師開內三學都壇主七字寶錄▨」
受己酉爲崇敎院敎學癸丑下批爲大慈恩宗師三重大匡兩街都僧統菩提薩埵摩訶那伽國一大師祐世君別頒一品俸祿甲寅首春延慶宮百八萬僧齋日」
上手獻兩街都僧統新鑄印乙卯封爲內殿懺悔師三學法主德慧圓證藏通玄辯國一大師命立懺悔府別鑄銀印專管僧政始差五敎二宗共議寺舍丁巳加封佛已」
海澄圓弘慈廣智大導師戊午備法駕邀入大旻天寺講院講三家章疏辛酉以▨▨寺爲下山所又移住桐華寺甲子封崇爲悟空眞覺妙圓無礙國尊乙丑復住」
法住寺至丁卯十二月吉早命入室修書上
主上封印付尙州牧使金永煦重封日將晡蕭然坐逝至八日茶毗于寺之西北崗▨塔于珊瑚殿東隅享年八十八受臘七十五師爲人略無緣飾因性循理▨道而」
行居常以寅粥午飯度日過中不食凡住重興寺十八年不因邀請一不踐權▨▨門日繙海藏內書經論無一不貫穿乃至餘書外典亦皆涉獵强記學不厭敎不」
倦恒存誘掖後進之心雖未學童蒙請講某書論某書懽然受請卽講不問▨▨酷署居處便否因以四方學者雲集霧從冀蒙餘潤一國公卿士大夫子弟之志于學者多出堂下平生事業率如此 上聞訃悼惜差官庀後事贈諡慈淨國尊塔號普明」
今上膺內禪之元年秋八月門人慈恩敎觀元興寺住持都僧統大師居玄祇林寺住持圓智大師行英天神寺住持通玄大師冲瑞玄化寺住持慈眞圓妙▨▨▨▨」
等三百一十四人賷師行狀申乞戴珉乃 命小臣文之臣叔琪聞 命憟惶不知所裁屛營隕越之地謹盥手拜稽爲之銘曰」
法王出世 如優曇花 以燈外燭 智鑑內磨 主張三學 福利王家 七十五臘 霈玆恩波 棄A1833.png浮界」
歸兜史陁 玉立白塔 靑山之阿 骨藏不露 名震瑜珈 命臣勒石 文拙無華 濡毫當撰 周慞孔多」
 至正二年壬午九月 日門人大慈恩宗師傳慈恩敎觀五敎都僧統重興寺兼天
 神寺住▨▨▨▨▨▨▨▨」
 明國一大師三重大匡祐世君 道卓 住持慈明眞覺廣敎大師 坦起等立」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下(1984)〕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전액(篆額)]

고려국(高麗國)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慈淨國尊)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 판선공사사(判繕工寺事)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 지제교(知製敎) 신(臣) 이숙기(李叔琪)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봉상대부(奉常大夫) 전교(典校)부령(副令) 직보문각(直寶文閣) 신(臣) 김원발(全元發)은 교지(敎旨)에 의하여 쓰다
신(臣)이 삼가 불교의 경전을 상고해 보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을 입으로 말씀하신 것은 경(經)이라 하고, 마음을 나타낸 것은 선(禪)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禪)은 가히 마음으로 전할 수 있으나, 교(敎)는 구연(口演)하기가 더욱 어렵다. 능히 입으로 강설하여 그 뜻을 연출해서 후학을 계몽하여 계(戒)·정(定)·혜(慧) 내3학(內三學)도단주(都壇主)가 되신 분은 오직 자은국일대사(慈恩國一大師)가 바로 이 분이다.
스님의 휘는 자안(子安)이나, 뒤에 현몽(現夢)으로 말미암아 미수(彌授)로 개명하였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고 선계(先系)는 일선군(一善郡)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한제(漢磾)이니 봉순대부(奉順大夫) 전객령(典客令)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어머니는 문씨(文氏)이니 공진(公進)의 딸로 화주군(和義郡)부인(夫人)에 추봉되었다. 출생한 후 며칠만에 어머니가 돌아갔으므로 자씨(姊氏)의 손에 의해서 자라났다. 9살 때 스승에게 나아가 시(詩)와 서(書)를 배웠는데 한 번만 들으면 문득 외웠으며 총명하고 민첩한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13살 적에 선산(善山) 원흥사(元興寺) 종연(宗然)스님을 찾아가 그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다음 경론(經論)을 수학하였다. 19살 때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상품과(上品科)에 합격하고 양주 국녕사(國寧寺)에 주석하였다. 29살 적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받고, 주로 유식론종지(唯識論宗旨)를 강설하였다. 기사(耆師)와 석덕(碩德)들이 모두 스님 앞에 경(經)을 펴고 배웠으므로, 희대(稀代)의 뛰어난 학자라고 칭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미령(弱齡)의 나이에 이미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종승(宗乘)어깨에 짊어져서 당대의 표준이 되었다. 삼중대사(三重大師)로서 주법(主法)한 적이 이전에는 없었는데 스님이 바로 그렇게 되신 분이다.
두 번째로 주석한 웅신사(熊神寺)에 있을 적에는 특별히 비서(批署)를 내려 수좌(首座)로 추대하였고, 세 번째로 장의사(莊義寺)에 주석하면서는 또 승통직(僧統職)을 받았다. 네 번째로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주석하다가 전하(殿下)에 나아가 하산(下山)하도록 윤허를 신청하였다. 이때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이 왕의 교지를 전달하였는데,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대종장(大宗匠)은 백천만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렵사오니, 스님께서는 경론(經論)의 장소(章疏)를 지어 길이 세간(世間)에 유통하여 널리 후진을 계몽토록 하소서"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스님께서는 왕명을 받은 이후로 항상 손에 경권(經卷)을 놓지 아니하고, 강론(講論)에 여념이 없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삼아 경론에 대한 주해를 찬술한 것이 무려 92권이나 되었다. 다섯 번째로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다가 태위대왕(太尉大王)즉조(卽阼)하던 해무술년(戊戌年) 5월에 이르러 왕이 비서(批署)를 내려 석교(釋敎)도승통(都僧統)과 중흥사주지행지원명대사(重興寺住持行智圓明大師)로 추대하였다.
여섯 번째로 유가사(瑜伽寺)의 주지로 있을 때 충렬왕은 원(元)나라 수도인 연도(燕都)에 있었다. 왕은 특히『다반야경(大般若經)』을 신지(信持)하여 숙위(宿衛)하는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밤마다 독송(讀誦)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하(殿下) 일행이 모두『대반야경』을 독송하였다. 일찍이 어느 날 상국(上國)의 한 강주(講主)가『법화경(法華經)』신해품(信解品)에 난해한 부분을 해석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당시 모든 강사들이 "이는 능히 해석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이 사신을 스님에게로 보내어 이에 대한 주해(註解)와 또 심지관경(心地觀經)에 대한 소기(疏記)를 짓도록 청하였다. 스님은 이 신해품 주해와 심지경관(心地觀經)에 대한 소기(疏記)를 사신에게 주어 왕에게 봉헌(封獻)하였다. 모든 강사들이 이를 보고 저마다 주장하던 쟁론(爭論)을 그치고 모두 찬미(讚美)하면서 그 희유(稀有)한 탁견(卓見)에 탄복하였을 뿐아니라 임금도 더욱 존숭하였다. 일곱 번째로 다시 장의사(莊義寺)로 이주하였다. 무신년(戊申年) 4월 비서(批署)를 내려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개내삼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 대장의사주지(大莊義寺住持) 왕교도승통(五敎都僧統) 광지묘변(廣智妙辯) 불각보명대사(佛覺普明大師)로 법칭(法稱)을 올렸다. 개내함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라는 7자는 보록(寶錄)에도 실려 있다. 기유년(己酉年)에는 숭교원(崇敎院)의 교학(敎學)이 되었고, 계축년(癸丑年)에 이르러 비서(批署)를 내려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양가(兩街)도승통(都僧統) 보리(菩提)살타(薩埵) 마가나가(摩訶那伽) 국일대사(國一大師) 우세군(祐世君)이라는 법칭(法稱)을 봉증하고 별도로 일품(一品)의 봉록(俸祿)을 드렸다.
갑인년(甲寅年) 1월연경궁(延慶宮)에서 백팔만승재(百八萬僧齋)를 베푸는 날에 임금께서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이라는 직인을 새로 주조하여 손수 바쳤다. 을묘년(乙卯年)에는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 삼학법주(三學法主) 덕혜원증(德慧圓證) 장통현변(藏通玄辯) 국일대사(國一大師)로 책봉하고, 참회부(懺悔府)를 설립하고 별도로 은(銀)으로 직인을 만들어 승정(僧政)을 전담 관리하되, 비로소 오교(五敎)이종(二宗)사사(寺舍)를 관리토록 하였다. 정사년(丁巳年)에는 불해징원(佛海澄圓) 홍자광지대도사(弘慈廣智大導師)로 봉하였으며, 무오년(戊午年)에는 법가(法駕)를 준비하여 대민천사(大旻天寺) 강원(講院)으로 맞아들여 법상종(法相宗) 3대가(三大家)의 장소(章疏)를 강설하였다. 신유년(辛酉年)에는 법주사(法住寺)로써 하산(下山)할 곳으로 삼았다가 다시 동화사(桐華寺)로 이주하였다. 갑자년(甲子年)에 이르러 오공진각(悟空眞覺) 묘원무애국존(妙圓無礙國尊)으로 책봉하였고, 을축년(乙丑年)에는 다시 법주사로 이주하였다가 정묘년(丁卯年) 12월 1일 아침 서기(書記)를 방장실로 불러 주상(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尙州牧使)인 김영후(金永煦)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晡時)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入寂)하였다. 8일에 이르러 법주사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다비(茶毗)하고 산호전(珊瑚殿) 동쪽 모퉁이에 탑을 세웠다. 세수는 88이요, 법랍은 75세였다.
스님의 사람됨은 간결하여 연식(緣飾)함이 없고, 천성(天性)에 의해 진리를 따르며 도를 닦았다. 일상생활은 인시(寅時)의 아침에는 죽공양을 하고, 오시(午時)의 점심공양에는 밥을 먹으며, 해가 정오(正午)를 지나면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일체 먹지 아니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서 무릇 18년을 주석하는 동안 초청을 받지 아니하고는 한 번도 권세가의 대문을 밟지 아니하였다. 날마다 용궁해장(龍宮海藏)인 내서(內書)에 속하는 경론(經論)을 연구하며 번역하여 정통하지 않음이 없으며, 다른 서적(書籍)인 외전(外典)까지도 또한 모두 섭렵하여 강기(强記)하였으며 항상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또한 가르치되 권태(倦怠)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항상 후진을 유액(誘掖)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여 비록 배우지 못한 동몽(童蒙)들이 찾아와서 모서(某書)를 강(講)하고 모서를 논(論)해주기를 청하면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강설하여 주고 열한(烈寒)과 혹서(酷暑)에도 거처(居處)의 불편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사방(四方)으로부터 학인(學人)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어 스님의 여윤(餘潤)을 얻고자 하였다. 일국(一國)의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 중 배움에 뜻을 둔 사람으로 스님의 문하에서 배출된 자가 매우 많았다. 스님의 평생 사업이 대개 이와 같았다.
임금께서 부고(訃告)를 듣고 애도하시면서 관원(官員)을 보내어 사후의 일을 돕게 하고, 시호를 자정국존(慈淨國尊)이라 하고 탑호를 보명(普明)이라 추증(追贈)하였다. 지금의 임금이신 충혜왕께서 선위(禪位)를 이어받은 원년(元年) 8월에 문인(門人)인 자은종(慈恩宗)의 원흥사(元興寺)주지(住持) 도승통(都僧統) 대사거현(大師居玄)기림사(祇林寺)주지(住持) 원지대사행영(圓智大師行英)천신사(天神寺)주지(住持) 통현대사충서(通玄大師冲瑞)현화사(玄化寺)주지(住持) 자진원묘(慈眞圓妙) (결락) 등 314인이 스님의 행장자료(行狀資料)를 모아 임금에게 올리고 행적비(行跡碑)를 세울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신(臣) 숙기(叔琪)가 왕명을 받고 두려워서어찌할 바를 몰라주저하다가 마치 높은 데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운월지지(隕越之地)를 무릅쓰고, 삼가 손을 씻고향불을 피운 다음 부처님께배계(拜稽)하고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르되
시방세계(十方世界) 법왕(法王)이신 석가출세(釋迦出世)는
우담발화(優曇鉢華) 나타나듯 희귀(稀貴)하도다.
마음 등불 높이 들어 밖을 비추고
지혜 거울 갈고 닦아 안을 밝히다. ①
계정혜(戒定慧)인 삼학도(三學道)를 펴고 전하여
임금님을 돕고 도와 성군(聖君)되시다.
75년 수행 끝에 입적(入寂)하시니
자은종(慈恩宗)의 깊은 진리(眞理) 홍포(弘布)하였네!
5탁세(五濁世)인 남염부제(南閻浮提)뒤로 돌리고
도솔천궁 내원(內院)으로 돌아가시니
문인(門人)들이 산호전(珊瑚殿) 옆 터를 닦아서
백옥탑(白玉塔)을 세우려고 뜻을 모으다. ③
그 유골(遺骨)은 탑(塔) 속에서 보이지 않고
유가(瑜伽)종사(宗師) 이름만이 진동(震動)하도다.
소신(小臣)에게 명을 내려 비(碑)를 세우나
이 비문(碑文)은 조잡하여 화조(華藻)가 없네. ④
붓을 잡고 먹을 묻혀 글을 지으니
스며드는 두려움을 참고 견디다.
지정(至正) 2년임오(壬午) 9월 일에 문인(門人)인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로써 자은교관(慈恩敎觀)
을 전(傳)하며, 5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며 중흥사지주(重興寺住持) 겸천신사주지(兼天神寺住持) (결락)
명(明) 국일대사(國一大師) 삼중대사우세군(三重大匡祐世君)인 도탁(道卓)과 주지(住持)인 자명진각광교대사(慈明眞覺廣敎大師) 탄기(坦起)등이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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