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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유허비의 옛좌대에 대한 소고(2005.12.9.안사연공동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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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5:21 조회1,3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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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 遺墟碑의 옛 좌대에 대한 小考

- 안사연 2005년 송년회 기념 임시 학술발표 자료

 


2005년 12월 9일(금)

안사연 공동 집필


안동김문의 발상지, 회곡

회곡(檜谷)은 우리 ‘안동김문(安東金門)의 발상지’이자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니, 현재의 경북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安東)은 본디 고타야군(古陀耶郡)이었으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개칭한 후 고려조에 다시 풍산현(豊山縣)으로 고쳤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다.

1914년 부군면(府郡面) 폐합시 안동군 풍산현 내면(安東郡 豊山縣 內面) 4개 동(洞)과 서선면(西先面) 일부 등 7개 동을 병합하여 풍산면(豊山面)으로 개칭하면서 11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943년 풍산면의 8개 동과 풍서면(豊西面)의 1개 동을 편입하여 회곡리를 비롯한 20개 동을 관할하기에 이르렀다. 1987년 1월 1일 단호리가 남후면에 편입돼 현재는 19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73년 7월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안동을 가리키는 이칭(異稱)은 고타야(古陀耶)를 비롯해 고창(古昌), 창녕(昌寧), 일계(一界), 지평(地平), 화산(花山), 고령(古寧), 고장(古藏), 석릉(石陵), 능라(陵羅), 안동(安東),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 등 상당히 많다.

이곳 회곡은 낙동강 상류지역으로서 두 강물이 만나는 지점(永嘉)이기에 일찍부터 상락(上洛)으로 불러왔다. 또한 우리 안동김문의 중시조이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시(諡) 충렬공(忠烈公)의 태지(胎址)로서 성장기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충렬공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면면히 구전돼 오고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안동김문을 일러 ‘낙동강 상류의 주인’이라는 뜻의 상락김씨 외에도 화산김씨, 영가김씨, 고창김씨, 복창김씨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회곡의 충렬공 유적


<회곡리 앞에서 본 상락대 원경 및 실제 위치도> (2003. 여름캠프시 촬영, 제작. 2003. 8. 6. 정중(도) 제공)


안동인(安東人)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회곡에 전해오는 우리 문중의 신화는 상당히 많다. 우선 충렬공 탄생지를 비롯해 무예를 닦으시던 시절에 말을 타고 단숨에 회곡리 건너편 상락대(上洛臺)로 건너뛰셨다는 무용담이 전해진다. 상락대는 회곡 앞을 가로지르는 낙동강 건너편 마암(馬巖) 옆이다. 이곳에는 충렬공께서 직접 부추를 심으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충렬공을 남몰래 사모했던 낭자에 관한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 낭자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곳이 바로 상락대로서 현재 상락대비(上洛臺碑)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다. 현지 종친들의 안내로 2003년 여름캠프 당시 상락대에 오르니 10여 평 남짓한 공간에만 유독 풀이 돋지 않아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회곡마을에는 충렬공 유허(遺墟)를 비롯해 냉평국대부인(冷平國大夫人) 죽주박씨(竹州朴氏) 할머님 단소와 재실 상락재(上洛齋), 충렬공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 충렬공께서 즐겨 마신 상락재 옆의 샘이 자리잡고 있다. 유허비 맞은편 안산(案山) 상고산(上孤山)에는 충렬공께서 낙동강 풍광을 완상하시던 고산정(孤山亭)이 검푸른 남양담(南陽潭) 위에 사뿐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영가지>와 <안동시지(安東市誌)>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중에서도 충렬공 유허는 충렬공께서 1283년에 벼슬에서 물러나신 후 회곡 입구에 초당(草堂)을 지으셨던 곳을 이른다. <영가지>에는 이 초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䫨)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誧)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국역 영가지 권지1의 56쪽>


영가지의 기록처럼 충렬공의 집터를 기리기 위해 유허비가 세워지게 되는데 언제, 어디에 유허비가 건립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현 유허비각 안에 있는 비각 연혁에 따르면, 조선조 인조 13년(1635년)에 유허비가 실석(失石)된 것을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그 후 숙종 43년(1717년)에 관(官)에서 유허비를 다시 세울 곳을 선정하였으며, 영조 41년(1765년) 3월에 관(官)에서 건너편 안산(案山 : 상고산)에 다시 유허비를 세웠다.

이 유허비가 현재 충렬공 유허비각 안에 있는 비(碑)로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유적명칭】고려 충렬공 김방경 유허비(高麗忠烈公金方慶遺墟碑)

【관리번호】760-800-231-099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시    대】조선시대

유허비의 크기는 높이 165cm, 폭 65cm, 두께 28cm이다. 앞면 글씨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숙종 37년(1711년) 안동 일직현에서 태어난 대산 선생은 영남학파의 거두로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유허비가 건너편 안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순조 14년(1814년)이다. 당시 충렬공 후손들은 안산보다는 충렬공께서 평소 소요하시던 초당 자리가 더 알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이건성조도감(移建成造都監)이 구성돼 前 선전 순영(永淳)을 비롯해 조역(助役)에 중옥(重玉)과 성학(聲鶴), 구재(鳩財)에 봉익(鳳翼) 등 후손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비를 옮기고, 1814년 5월 25일 미시(未時)에 입주(立柱)한 후 그 달 28일 묘시(卯時)에 상량(上樑)하였다. 이로써 그 당시 비각도 함께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 말 권돈인(權敦仁 1783∼1859년)이 경상감사로 부임할 당시 김성동이란 자가 충렬공 유허지에 자기 부모의 묘소를 써서 4년 동안이나 송사가 걸려 있었다. 이에 감사 권돈인은 김성동을 가두고 이장(移葬)토록 명령함으로써 유허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 뒤 2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비각이 낡아 1985년 9월 15일 안동김씨대종회에서 1,272만 9,000원을 들여 유허비각과 연혁비(沿革碑)를 새로 세워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하지만 현지 종친의 증언에 따르면 유허비각 바위에 오래 된 벽화가 있었는데, 비각 확장공사로 인해 벽화가 그려진 바위를 깨서 그 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한편, 안동김씨대종회에서는 연간계획에 의거해 2005년 10월 21일부터 유허비각을 수리하는 중이다.


충렬공 유허비의 옛 좌대


충렬공 유허비가 현재 위치로 옮겨지면서 유허비각 안에는 장식미가 거의 없는 고졸한 형태의 거북 좌대가 새로 마련되고, 안산에 있던 좌대는 200여 년간 원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안산의 옛 좌대는 거대한 자연석 윗면을 다듬은 형태로 장식적인 요소가 전무하다. 다만, 윗면을 편평하게 다듬고, 유허비가 들어갈 자리를 직사각형 형태로 파내어 웬만한 힘에는 쓰러지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무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5톤까지 견디는 홋줄이 터져 나갈 정도인 것으로 보아 그 이상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좌대는 2006년에 냉평국대부인 할머니 단묘를 보수하면서 옮길 예정이었는데, 2005년도 충렬공 시제에 참석한 영환, 태우 등이 안산에 도로확장 및 측량을 알리는 붉은 깃발이 꽂힌 것을 보고 안사연에서 긴급히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옛 좌대의 세부사항은 다음과 같다.(형태는 사진 참조)


재질 : 자연석

상단 가로 길이 : 1,700mm

상단 세로 길이 : 1,300mm

다듬은 면 가로 길이 : 1,020mm

다듬은 면 세로 길이 : 950mm

다듬은 면 높이 : 150mm

유허비 홈 가로 길이 : 670mm

유허비 홈 세로 길이 : 300mm


이에 비해 안사연이 현지에서 측정한 비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높이 : 최대 1,640mm,

좌우측 높이 : 1,570mm

전면 폭 : 656mm

두께 : 290mm

거북좌대 앞뒤 길이 : 1,250mm

거북좌대 폭 : 1,450mm

비각 : (가로)1700mm×(세로)1,460mm


문화재총람 등에 실려 있는 비의 크기와 극히 적은 차이가 있으나, 2003년 안동김씨 여름캠프 당시 자[尺]가 없어 실과 풀 등을 이용해 측정한 수치와 거의 차이가 없다. 또한 현지에서 안사연이 측정한 비석 크기와 옛 좌대를 비교하면 꼭 들어맞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안산 길가에 있는 자연석에 홈이 파인 돌이 옛 유허비 좌대임이 확인되었다.


이 좌대는 1985년 유허비각 보수 당시에도 옮기려고 하였으나, 워낙 크기가 크고 무거워 포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원래 위치에서 5m 정도 길가 쪽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원래 놓였던 형태로 앞뒤가 바뀌게 되었다. 이에 중장비 중에서 가장 큰 06형 포크레인을 동원해 옛 좌대를 파낸 다음 현지 종친들의 의견을 따라 임시로 상락재 옆 화단으로 옮겼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하나도 선조님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돌멩이 하나 모래 한 톨이라도 귀한 것이라는 일념과 언제 도로 확장공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추운 날 서둘러 진행되었건만 무사히 마친 것도 모두 선조님들께서 보살펴 주신 은덕이라 하겠다.


안산의 유허비 옛 좌대 임시 이건(移建) 행사

■ 일시 : 2005년 12월 3일

■ 장소 : 경북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 참석 : 12명

   현지 : 봉회, 봉수, 광득

   대구 : 재화, 정중

   서울 : 영환, 영윤, 발용, 태영, 태우, 항용, 윤식



■ 자료 : 안동김씨홈페이지 및 주회 종친 게시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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