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瓊島)/금수정 옆 초대형 초서/ 누가 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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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7-10-17 11:37 조회932회 댓글3건본문
경도(瓊島)/금수정 옆 초대형 초서/ 누가 썼는가?
솔내 김영환
금수정(金水亭)은 조선선비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이다. 금수정을 주제로 쓴 시만 60명이 넘고 금수정을 다녀간 명사들은 수백명으로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다. 금수정의 아름다움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금수정 아래로 흐르는 영평천이야말로 영평팔경을 아우르는 절경이다. 이 영평천에는 수많은 암각문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금수정 주변의 암각문과 창옥병 주변의 암각문이 유명하다.
금수정주변의 암각문은 조선 중기 봉래(蓬萊) 양사언의 초서로 된 증금옹(贈琴翁)시(詩)가 새겨지면서 유명해 졌다. 그 이후 석봉(石峯) 한호, 한음(漢陰) 이덕형등 여러 시인묵객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영평천 가운데 새겨진 증금옹(贈琴翁)시와 준암(尊嵒) 경도(瓊島)가 눈에 도드라지고, 금수정 입구에 있는 동천석문(洞天石門)과 회란석(廻蘭石), 마애절벽에 새겨진 금수정(金水亭)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초서로 된 경도(瓊島)는 그 크기가 가로 90cm 세로230cm 되는 대작으로 <포천의 암각문> (홍순석;한국문화사 1997.2.)에서 홍순석교수는 경도(瓊島)의 크고 웅장함을 말하면서 ‘본래 양사언은 큰 글씨를 잘 썼던 명필가이나, 이처럼 규모면에서 큰 자료는 매우 희귀하다. 양사언이 금수정에서 소요하며 각자했을 개연성이 짙다.’ 라고 쓰고 있다. 또 ‘금수정 지역 암각문 가운데, <자료2;6>[증금옹시] <자료2;7>[경도]는 매우 중시되는 자료이다. 이 두 자료는 모두 양사언의 필적이다’ 라고 써서 경도(瓊島)가 봉래 양사언의 필적으로 못박아놓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든다. 봉래 양사언(1517년;중종12~ 1584년;선조17)이 증금옹(贈琴翁)시를 짓고 바위에 새겨놓은 이후 동주(東州) 이민구(1589년;선조22~1670년;현종11), 서계(西溪) 박세당(1629년;인조7~1703년;숙종29), 지촌(芝村) 이희조(1655년;효종6)~1724년;경종4), 뇌연(䨓淵) 남유용(1698년;숙종24)~1773년;영조49), 월곡(月谷) 오원(吳瑗)(1700년;숙종26-1740년;영조16)등 많은 문사들이 바위에 새겨진 증금옹(贈琴翁)시를 언급했지만 그 옆에 있는 경도(瓊島)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다. 만약 대형 초서 경도(瓊島)가 당시에 증금옹(贈琴翁)시 옆에 새겨져 있었다면 증금옹(贈琴翁)시를 언급하면서 바로 옆에 웅장한 초서 경도(瓊島)를 못 보았을 리가 없고, 보았다면 경도(瓊島)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음직한데 전혀 없다.
이후 경도(瓊島)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봉래 양사언(1517년;중종12~ 1584년;선조17)보다 100년후에 태어난 보만재(保晩齋) 서명응(1716년;숙종42~1787년;정조11)의 문집 보만재집에서 볼 수 있다.
보만재집 <東遊山水記 金水亭>편에서 ‘바위위에 동천석문과 백운계가 새겨져있는데 이는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회란석은 중국사신 허국의 글씨이고 금수정은 봉래 양사언의 글씨이다. 조대는 금수정주인 김씨의 글씨이다.(石之上刻曰洞天石門。曰白雲溪。石峯韓濩筆也。曰廻瀾石。天使許國筆也。曰金水亭。蓬萊楊士彦筆也。曰釣臺。亭之主金氏筆)라고 쓰고, 내 가운데 와준이 있는데 여러 말 정도가 들어갈 만 하다고 하면서 그 위에 준암 경도 커다란 네 글자가 있는데 모두 김씨의 글씨이다. 또 두 편의 시가 있는데 이는 양사언의 글씨이다(中凹窪可容數斛。上刻尊巖瓊島四大字。皆金氏筆。二詩。楊士彦也。)라고 했다.
金水在永治西五六里。由亭而左。水汨㶁流。怒而爲濤。激而爲沫。綿亘六七里。至亭之側。怪石簇焉。有壁而竪者。舟而臥者。獸踞而人立者。皆靑楓倒植。遠見若苔蘚然。石之上刻曰洞天石門。曰白雲溪。石峯韓濩筆也。曰廻瀾石。天使許國筆也。曰金水亭。蓬萊楊士彦筆也。曰釣臺。亭之主金氏筆也。水洄洑石底。泓澄泂澈。遊魚可數。轉而彎抱深碧。上涵亭影。又轉而縈匯漫流。以出亭右。外列奇峯。高可數十丈。廣延數里。方夏草樹茂密。影瀉溪水。若畵圖然。洲落沙出。瑩白如雪。有石在其邊。中凹窪可容數斛。上刻尊巖瓊島四大字。皆金氏筆。二詩。楊士彦也。
이어서 연경재(硏經齋) 성해응1760년;영조36~1839년;헌종5)의 문집에서 등장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경재집 <詩話 편 蓬萊詩句>에서 증금옹(贈琴翁)시를 소개하면서 이 시가 경도(瓊島)옆에 새겨져 있다(刻于洞陰金水亭瓊島之傍)라고 했다.
또 <題楊蓬萊筆刻後 >에서도 금수정(金水亭) 편액은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하면서, 증금옹(贈琴翁)시가 경도(瓊島)옆에 새겨져 있다고 했다. (金水亭扁。亦蓬萊筆也。蓬萊筆多刻在巖石間。而瓊島之傍 所刻尤奇。卽亦所自製也。詩曰。綠綺琴伯牙心。一皷復一吟。鍾期是知音。泠泠虗籟起遙岑。江月娟娟江水深。)
보만재 서명응(1716년;숙종42)~1787년;정조11)이나 연경재 성해응(1760년;영조36~1839년;헌종5)이 경도(瓊島)를 언급하면서도 금수정주인 김씨가 썼다고만 해서 과연 누구인가를 알 수가 없다
이후 한유 (韓愉 1868~1911, 고종5~왜정2)가 기행문(西行程曆)을 쓰면서 금수정에서 하룻밤을 잔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서행정력(西行程曆) 이월 계사 십오일 (二月 癸巳 十五日 );서기 1893년 고종30년
‘척약재 후손인 도사 김춘경을 방문한 후(訪金都事春卿丈惕若齋后) 금수정에 올랐다. 금수정은 본래 서자인 김윤복의 소유였으나 지키지 못하고 양사언에 넘어갔다가 다시 김씨에게 되돌아 왔음(登金水亭。亭舊為金氏別業。有孽子胤福。不能守。 則以亭傳之楊蓬萊士彦。 其后蓬萊復還之金家云)을 말하고, 동천석문과 부운벽은 한석봉이 쓰고 회란석은 중국사신 허국이 썼으며 백운루는 옥동 이서가 썼다 (曰洞天石門。曰浮雲壁者。韓石峯筆也。曰囬瀾石者。明儒許國筆也。曰白雲樓者。玉洞李溆筆也), 또 냇가에 있는 술동이바위를 말하며 준암(尊喦)은 역시 봉래 글씨이고 경도는 김상사의 증조부 글씨(尊喦二字。亦蓬萊筆也 又 刻瓊島者。金上舍都事曾祖名某筆也。)라고 하여 경도의 친필자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사 김춘경(金春卿)은 김상원(金相元 일명 金榮國)이다. 김상원은 척약재학음집 중간본의 서문을 쓴 사람으로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金相元(榮國1833-1918)의 증조부는 바로 금수정을 중건한 김택인(金宅仁)이다.
(金宅仁-金定浩-金義友-金相元)
이로써 경도(瓊島)의 친필자자 그 웅대하고 휘날리는 필체로 보아 양사언의 필적을 의심하였으나 척약재 종손가의 김택인(金宅仁)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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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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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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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감사합니다.
이번에 확실히 밝혀진 사실로 그동안 잘못 알려진 일들이 바로 잡히길 기대합니다.
김의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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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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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그렇군요.
대부님 애쓰셨네요
김영환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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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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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경도 친필자에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어 다시 쓴 글을 아래에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