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인 김씨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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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6-06-15 23:37 조회960회 댓글4건본문
숙부인 김씨 행장
참으로 어질고 현숙한 아내, 심성 고운 분인가 봅니다.
첫 구절은 번역이 조금 이상하네요.
우리 집안을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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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집총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惺所覆瓿稿卷之十五○文部十二
亡妻淑夫人金氏行狀
夫人姓金氏。上洛大姓也。前朝大相方慶之玄孫惕若齋九容。有盛名於麗季。官至三司左使。其四代孫胤宗。武擧官節度。而其子震紀。庚子司馬。筮仕別提。寔生諱大涉。亦司馬癸酉。而筮仕都事。娶觀察使靑松沈公銓之女。夫人卽其第二女也。生隆慶辛未。年十五歸吾家。性謹愿樸而無飾。勤於織任組紃無少怠。言若不出口。事母大夫人甚恭。晨夕必親省。食必嘗進。遇節則饋時食甚豐。待婢僕嚴。而怒罔詈以惡語。母大夫人稱之曰。我賢婦也。余方少年好狎遊。無幾微見於顏面。若或少縱則輒曰。君子處己當嚴。古人有不入酒肆茶房者。況甚於此乎。余聞而心愧。少或戢焉。常勸余勤學曰。丈夫生世。取科第躋膴仕。可以爲親榮。而私於己者亦多。君家貧姑且老。勿恃才而悠泛度日。光陰迅速。後悔曷追乎。及壬辰避賊之日。方娠困頓至端川。七月初七日。生子。越二日。賊猝至。巡邊使李瑛退守磨天嶺。余侍母挈君。達夜踰嶺。至臨溟驛。氣之不能語。時同姓人許珩。邀與俱避海島。不得留。強至山城院民朴論億家。初十日夕。命絶。以牛買棺。裂衣以斂。肌肉尙溫不忍埋。俄聞賊攻城津倉。都事公亟命權厝後岡。享年二十二。而同住凡八年。嗚呼痛哉。其子以無乳夭。初生一女。長適進士李士星。生子女各一。己酉。余陞堂上拜刑曹參議。以例追封淑夫人。噫。以君之淑行。年不克中壽。且絶其嗣。天道亦難諶矣。方其窮時。對君挑短檠。熒熒夜艾。展書讀之。稍倦則君必戲曰。毋怠慢遲我夫人帖也。豈知十八年之後。只以一張空誥。薦之於靈座。而享其榮者。非吾結髮之逑。君若有知。亦必嗟悼。嗚呼哀夫。乙未秋。返自吉州。又瘞於江陵外舍。庚子三月。從先夫人永窆於原州西面蘆藪。其原則在先壟之左。寅坐而申向也。謹狀。
망처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의 행장(行狀)
부인의 성(姓)은 김씨(金氏)니 서울의 대성이다. 고려조 정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玄孫)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삼사(三司)의 좌사(左使)에 이르렀다. 그 사대손(四代孫)인 김윤종(金胤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였고, 그 아들 김진기(金震紀)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별제(別提)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휘(諱) 김대섭(金大涉)을 낳으니 또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 도사(都事)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전(銓)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夫人)은 바로 그 둘째딸이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낳아, 나이 열다섯에 우리집에 시집왔다. 성미가 조심스럽고, 성실하고도 소박하여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하기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을 드릴 때 꼭 맛을 보고 드렸다. 철을 따라 제 철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종들을 다루기를 엄격히 했지만 잘못을 용서해 주었고 욕지거리로 꾸짖지 않으니 모부인께서 칭찬하시되,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
하셨다. 내 한창 젊은 나이에, 부인에게 압류(狎遊)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싫은 기색을 얼굴에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으며,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문득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ㆍ다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던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겠어요?”
하였으므로, 내 듣고 마음으로 부끄러워, 더러 조금이나마 다잡힘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부지런히 글 공부하기를 권하여,
“장부가 세상에 나서 과거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 이롭게 하는 이도 또한 많습니다. 당신은 집이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늙어 계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니 뉘우친들 어찌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왜적을 피하던 때에는 마침 태중(胎中)이어서 지친 몸으로 단천(端川)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이틀 후에 왜적이 갑자기 닥치자, 순변사(巡邊使) 이영(李瑛)이 물러나 마천령(磨天嶺)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대를 이끌고서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臨溟驛)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기운이 지쳐 말도 못하였다. 그때 동성(同姓)인 허행(許珩)이 우리를 맞아 같이 해도(海島)에 피란하였으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산성원(山城院) 백성 박논억(朴論億)의 집에 이르러 10일 저녁 숨을 거두매, 소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斂)을 하였으나, 오히려 체온이 따뜻하므로 차마 묻지를 못하였는데,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城津倉)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都事公)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스물둘로 같이 살기는 여덟 해였다.
아! 슬프다. 그 아들은 젖이 없어 일찍 죽고, 첫딸은 자라 진사 이사성(李士星)에게 시집가서 아들ㆍ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1609, 광해1)에 내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직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니 예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봉케 된 것이다. 아! 그대 같은 맑은 덕행으로, 중수(中壽)도 못한데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천도(天道) 또한 믿기 어렵다.
바야흐로 우리 가난할 때, 당신과 마주 앉아 짧은 등잔심지를 돋우며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지새워 책을 펴 놓고 읽다가 조금 싫증을 내면 당신은 반드시 농담하기를,
“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인첩(夫人帖)이 늦어집니다.”
하였는데, 18년 뒤에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궤연[靈座]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만약 앎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길주에서 돌아와, 또한 강릉 외사(外舍)에 묻었다가, 경자년(1600, 선조33) 3월에 선부인을 따라 원주 서면 노수(蘆藪)에 영장(永葬)하니, 그 묘는 선산 왼쪽에 있으며 인좌(寅坐) 신향(申向)이다. 삼가 행적을 쓰노라.
참으로 어질고 현숙한 아내, 심성 고운 분인가 봅니다.
첫 구절은 번역이 조금 이상하네요.
우리 집안을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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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집총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惺所覆瓿稿卷之十五○文部十二
亡妻淑夫人金氏行狀
夫人姓金氏。上洛大姓也。前朝大相方慶之玄孫惕若齋九容。有盛名於麗季。官至三司左使。其四代孫胤宗。武擧官節度。而其子震紀。庚子司馬。筮仕別提。寔生諱大涉。亦司馬癸酉。而筮仕都事。娶觀察使靑松沈公銓之女。夫人卽其第二女也。生隆慶辛未。年十五歸吾家。性謹愿樸而無飾。勤於織任組紃無少怠。言若不出口。事母大夫人甚恭。晨夕必親省。食必嘗進。遇節則饋時食甚豐。待婢僕嚴。而怒罔詈以惡語。母大夫人稱之曰。我賢婦也。余方少年好狎遊。無幾微見於顏面。若或少縱則輒曰。君子處己當嚴。古人有不入酒肆茶房者。況甚於此乎。余聞而心愧。少或戢焉。常勸余勤學曰。丈夫生世。取科第躋膴仕。可以爲親榮。而私於己者亦多。君家貧姑且老。勿恃才而悠泛度日。光陰迅速。後悔曷追乎。及壬辰避賊之日。方娠困頓至端川。七月初七日。生子。越二日。賊猝至。巡邊使李瑛退守磨天嶺。余侍母挈君。達夜踰嶺。至臨溟驛。氣之不能語。時同姓人許珩。邀與俱避海島。不得留。強至山城院民朴論億家。初十日夕。命絶。以牛買棺。裂衣以斂。肌肉尙溫不忍埋。俄聞賊攻城津倉。都事公亟命權厝後岡。享年二十二。而同住凡八年。嗚呼痛哉。其子以無乳夭。初生一女。長適進士李士星。生子女各一。己酉。余陞堂上拜刑曹參議。以例追封淑夫人。噫。以君之淑行。年不克中壽。且絶其嗣。天道亦難諶矣。方其窮時。對君挑短檠。熒熒夜艾。展書讀之。稍倦則君必戲曰。毋怠慢遲我夫人帖也。豈知十八年之後。只以一張空誥。薦之於靈座。而享其榮者。非吾結髮之逑。君若有知。亦必嗟悼。嗚呼哀夫。乙未秋。返自吉州。又瘞於江陵外舍。庚子三月。從先夫人永窆於原州西面蘆藪。其原則在先壟之左。寅坐而申向也。謹狀。
망처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의 행장(行狀)
부인의 성(姓)은 김씨(金氏)니 서울의 대성이다. 고려조 정승 김방경(金方慶)의 현손(玄孫)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삼사(三司)의 좌사(左使)에 이르렀다. 그 사대손(四代孫)인 김윤종(金胤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였고, 그 아들 김진기(金震紀)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별제(別提)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휘(諱) 김대섭(金大涉)을 낳으니 또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 도사(都事)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전(銓)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夫人)은 바로 그 둘째딸이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에 낳아, 나이 열다섯에 우리집에 시집왔다. 성미가 조심스럽고, 성실하고도 소박하여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하기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을 드릴 때 꼭 맛을 보고 드렸다. 철을 따라 제 철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종들을 다루기를 엄격히 했지만 잘못을 용서해 주었고 욕지거리로 꾸짖지 않으니 모부인께서 칭찬하시되,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
하셨다. 내 한창 젊은 나이에, 부인에게 압류(狎遊)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싫은 기색을 얼굴에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으며,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문득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ㆍ다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던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겠어요?”
하였으므로, 내 듣고 마음으로 부끄러워, 더러 조금이나마 다잡힘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부지런히 글 공부하기를 권하여,
“장부가 세상에 나서 과거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 이롭게 하는 이도 또한 많습니다. 당신은 집이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늙어 계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니 뉘우친들 어찌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왜적을 피하던 때에는 마침 태중(胎中)이어서 지친 몸으로 단천(端川)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이틀 후에 왜적이 갑자기 닥치자, 순변사(巡邊使) 이영(李瑛)이 물러나 마천령(磨天嶺)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대를 이끌고서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臨溟驛)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기운이 지쳐 말도 못하였다. 그때 동성(同姓)인 허행(許珩)이 우리를 맞아 같이 해도(海島)에 피란하였으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산성원(山城院) 백성 박논억(朴論億)의 집에 이르러 10일 저녁 숨을 거두매, 소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斂)을 하였으나, 오히려 체온이 따뜻하므로 차마 묻지를 못하였는데,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城津倉)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都事公)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스물둘로 같이 살기는 여덟 해였다.
아! 슬프다. 그 아들은 젖이 없어 일찍 죽고, 첫딸은 자라 진사 이사성(李士星)에게 시집가서 아들ㆍ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1609, 광해1)에 내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직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니 예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봉케 된 것이다. 아! 그대 같은 맑은 덕행으로, 중수(中壽)도 못한데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천도(天道) 또한 믿기 어렵다.
바야흐로 우리 가난할 때, 당신과 마주 앉아 짧은 등잔심지를 돋우며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지새워 책을 펴 놓고 읽다가 조금 싫증을 내면 당신은 반드시 농담하기를,
“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인첩(夫人帖)이 늦어집니다.”
하였는데, 18년 뒤에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궤연[靈座]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만약 앎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길주에서 돌아와, 또한 강릉 외사(外舍)에 묻었다가, 경자년(1600, 선조33) 3월에 선부인을 따라 원주 서면 노수(蘆藪)에 영장(永葬)하니, 그 묘는 선산 왼쪽에 있으며 인좌(寅坐) 신향(申向)이다. 삼가 행적을 쓰노라.

댓글목록
김재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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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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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밤새 비가내리더니 아침 출근 길 하늘이 너무 맑고 푸르더니
할머님의 애잔한 삶을 느끼며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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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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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할머니 말씀도 꽃처럼 이쁘게 하셨네요.
열다섯에 시집 가서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삶이란...
김광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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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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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조카님 왜 지우셨어요? 다시 올려 주시지요.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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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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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저씨, 먼저 올린 글 말씀하시는가요?
대종회 총장님께서 화면 맨 위 메뉴에서
<열린마당> → <자료실>로 글들을 옮기셨는데요.
자료 성격이 있는 글들은 그쪽으로 옮기시는 것 같습니다.